[마을의진화]성당포구와 당산별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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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포구와 당산별신제
고려·조선, 세곡 모아 운반…순풍·마을·안녕·풍년기원
작성 : 2009-09-21 오후 6:36:20 / 수정 : 2009-09-21 오후 9:11:52
권순택(kwon@jjan.kr)
조운선의 무사운행과 마을의 안녕·풍원을 기념한 당산 별신제의 당신나무. |
성당포구마을은 고려에서 조선후기까지 세곡을 관장하던 성당창(聖堂倉)이 있던 곳으로 성당포(聖堂浦), 또는 성포(聖浦)라 불렸다. 성당이란 명칭은 원래 금강의 번성한 포구라는 의미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고 이성계의 조선왕조 건국에 반발해 이 곳으로 은둔했던 안(安)씨 성에 은성당(隱聖堂)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이 이주해 살았다 해서 붙여졌다는 설도 있다.
성당포는 사방이 평야지대이고 금강을 통해 배편으로 접근하기 쉬워 호남 일대의 조세미를 거두어 서울의 서강나루로 보내는 행정과 해상교통의 요충지였다. 당시 함열과 여산 고산 임피 남원 운봉 금산 등 10개 군·현에서 조세미를 거둬들였으며 음력 3월께 서울로 조곡을 싣고 가 춘궁기때 서울사람들에게 식량을 공급해 왔다는 것.
관청으로는 세금을 징수하는 봉세청과 뱃사공을 관장하던 사공청, 객사 등이 즐비했으며 사공청에는 200여명에 달하는 뱃사공이 상주했었다는 기록이다.
1714년 조선 숙종 40년에 조창을 개축하고 포구를 늘려 조운선을 51척으로 증선하면서 200년여 동안 번성했으나 1895년 폐창된 이후 쇠락의 길을 면치 못했다.
당시 조세미를 운송하다 풍랑을 만나 침몰하거나 암초에 걸려 난파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성당포에 순풍당을 세우고 조운선의 조난방지와 안녕을 기원하는 별신제를 올렸다. 실제 성당포에서 조곡을 싣고 가던 조운선이 물살이 거센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침몰하는 바람에 쌀 1천석이 썩었다 해서 이 곳을 지금도 '쌀 썩은 여(곳)'이라고 부른다 한다.
성당창이 없어지면서 순풍당에서 400여년을 이어 오던 별신제는 당산제로 바뀌었고 그나마 성당포의 포구기능이 사라지고 폐촌이 되다시피 하면서 1970년대 초 당산제도 중단되고 말았다.
1999년 마을주민들이 뜻을 모아 익산문화원과 함께 별신제 복원에 나섰고 매년 3~5월 사이에 마을 뒤 수령 500년된 은행나무(도 지정기념물 109호)에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당산별신제 행사를 개최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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