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진화]⑦중앙정부 마을만들기 사업-주민 한마음, 태풍피해 복구…폐허를 꽃동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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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진화]
⑦중앙정부 마을만들기 사업
주민 한마음, 태풍피해 복구…폐허를 꽃동네로
작성 : 2009-07-13 오후 6:31:14 / 수정 : 2009-07-13 오후 8:16:33
권순택(kwon@jjan.kr)
(왼쪽부터)강릉시 주문진읍 복사꽃마을 전경, 강릉시 복사꽃마을 마을정보센터. |
함대호 복사꽃마을위원장. |
수마가 할퀴고 간 폐허 더미에서 꽃마을로 새 단장한 강릉시 주문진읍 장덕 2리 복사꽃마을.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은 아픔을 딛고 주민들이 꿋꿋하게 일어서 재창조한 마을이다.
복사꽃 마을에 재난의 악몽이 닥친 것은 지난 2002년 8월 31일 태풍 루사때. 강풍과 폭우를 동반한 루사가 강원도 일대를 휩쓸면서 복사꽃마을 역시 엄청난 위력을 지닌 태풍을 피해 갈 수는 없었던 것. 하루 아침에 민가 12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산골의 다랑이 농경지는 거대한 하천으로 변해 버렸다. 대자연의 재앙 앞에 주민들 모두 넋을 잃고 실의에 빠졌을 때 전국 각지에서 쇄도하는 도움의 손길이 이들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됐다.
함대호 복사꽃마을위원장(57)은 "전국에서 구호물품이 전해지고 자원봉사자들이 밀려오는 것을 보고 '모든 국민들이 우리를 도와주는데 이대로 주저 앉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주민들이 다시 일어서게 됐다"고 말했다.
104가구 300여명의 주민들이 재기를 위해 발벗고 나섰다. 먼저 뭍으로 바뀐 하천부지에 마을 방문자센터를 건립하고 그 해 농협중앙회가 선정하는 팜스테이 마을로 지정받았다. 내친김에 2003년에는 정보화마을 사업을 신청, 지원금 3억원으로 마을회관을 정보화센터로 리모델링하고 각 가정마다 PC를 보급하게 됐다. 마을 홈페이지를 구축하고 마을과 지역특산품을 알리면서 온라인 전자상거래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특히 60여년 동안 명성을 이어 온 친환경 복숭아와 자두가 도시 소비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었다. 또 일교차가 큰 지역 특성 때문에 단단한 육질과 당도가 높은 사과와 배도 각광을 받으면서 새 소득원으로 자리 잡았다.
복사꽃 마을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되면서 내방객들이 몰려들자 이들을 위한 숙박시설과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게 됐다. 이에 2005년 새농촌마을사업을 신청, 선정돼 마을주차장과 식당 등을 건립하고 원두막과 나무다리 등 볼거리도 조성했다. 이어 2007년 녹색농촌체험마을 지원을 받아 미니 허수아비와 마리오네트(꼭두각시 인형) 제작 체험장과 세미나실 등도 구비했다. 여기에 4월 중순 복사꽃 축제와 8월초 허수아비 축제를 개최하고 사계절 체험프로그램도 마련, 탐방객들에게 각종 볼거리와 먹을거리 즐길거리 등을 제공해 발길이 쇄도하고 있다.
이처럼 복사꽃마을이 폐허를 딛고 짧은 기간에 전국에서 주목받는 마을로 발돋움한 것은 노·장·청으로 이어지는 마을 주민들의 화합과 응집력이 밑거름이 됐다. 특히 젊은층이 주축이 돼 지난 1995년 결성한 은행회가 복사꽃마을 만들기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함대호 위원장을 비롯 젊은층 20여명이 '젊은 사람들이 마을을 위해 뭔가 해보자'는 취지에서 마을에 있는 수령 800년 된 은행나무(천연기념물 166호)에서 명칭을 따 은행회를 조직했던 것.
이들은 먼저 마을소식지인 '고향신문'을 만들어 주민 뿐만 아니라 출향인사들에게 배포, 소통과 연결의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또 모임 자금으로 주민들에게 주문진읍에 있는 컴퓨터학원 수강비를 지원하고 당시 거금(350만원)을 들여 마을에 컴퓨터도 구비했다. 이같은 노력들이 정보화마을 선정과 전자상거래 등 마을 발전을 촉진하는 결실로 이어진 것이다.
함대호 위원장은 "나이가 들다보니 현재 은행회 회원은 6명에 불과한 반면 55세 이상 노동회 회원이 18명으로 늘어나 주류 축이 이동했다"면서 "노·장·청년의 단합과 태풍피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은 주민들의 의지가 오늘의 복사꽃마을로 탈바꿈하게 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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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등록일 2009.07.1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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