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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돌아왔다] 6. 포천 교동마을 - 풍경·일상 고스란히… ‘수몰 실향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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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돌아왔다] 6. 포천 교동마을 | ||||||||||||
풍경·일상 고스란히… ‘수몰 실향민’은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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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몰(水沒)의 역사는 근대화, 정확히 말하면 댐 건설의 역사와 겹친다. 자연적 지형의 변화로 한 마을이 깡그리 사라지는 일은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댐에 갖힌 수만 톤의 물은 그 발치에 누대에 걸쳐 이어온 지역 공동체를 수장시켜 버린다. 수몰은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을 낯선 땅으로 쫓아낸다. 이른바 ‘수몰 실향민’이다. 분단으로 고향을 잃은 것이 아니라 물에 잠긴 고향을 둔, 전혀 다른 류의 실향민이다. 물에 잠길 집을 떠나 인근 마을에 새로 뿌리를 내리거나 고향을 등지고 도회로 떠나야 하는 이들에게 미래는 낯설고 두렵기만 하다. 포천시 관인면 중1리 교동마을 사람들 이야기다. 수장 결정에 3분의 1 이상 고향 떠나 지난 21일 수원에서 북쪽으로 3시간 가까이 차를 몰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휴전선에서 불과 23㎞ 떨어진 곳, 도롱뇽(蛟)이 많이 산다는 청정 1급수 마을, ‘교동(蛟洞)마을’이다. 입구부터 부서진 가옥 여러 채가 눈에 들어왔다. 마당에는 어디가 입구인지 찾기 힘들정도로 수풀들이 제멋대로 웃자라 있었다. 6·25전쟁 때 초토화됐던 교동마을은 전쟁이 끝나자 다시 집을 짓고, 길을 내고, 논밭을 일궈 지금의 모습이 됐다. 그러나 휴전 후 60년을 채우지 못하고 지금보다 고도가 20m쯤 높은 땅으로 곧 이주해야 한다. 한탄강 하류에 2014년까지 홍수조절용 댐이 완공된다. 당장 물이 들어오진 않지만 한여름 집중호우가 내리면 이곳까지 잠기는 ‘수몰 예정지’다. 주민이 떠나면 빈 집은 한국수자원공사가 접수해 허물어 버린다. 32가구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보상금을 받고 떠났다. 산 중턱으로 집단이주키로 한 19가구만 지금 이곳을 지키고 있다. 정부의 수몰 결정은 여느 수몰마을과 마찬가지로 이 마을 사람들에게도 씻기 힘든 상처를 남겼다. 찬성과 반대, 마을 주민은 둘로 갈라졌고, 어제의 형님 동생은 ‘보상에 눈먼 놈’으로 전락했다. “평생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안해봤지. 그런데 우리가 반대하면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겪게 된다는 데 안 할 수도 없고…. 다시 한 마을이 되기는 되겠지만 상처가 너무 커. 우리 자식들 대에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코흘리개로 이사 와 40년 넘게 터를 잡아온 이기종 이주대책위원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끝을 흐렸다. 생계 막막하던 이들에 예술가 청년들 구원투수로 집은 어떻게 지을지, 뭘 해 먹고 살지, 막막하기만 하던 이들에게 구원군이 찾아왔다. 지난해 8월, 마을에는 소위 예술가로 불리는 젊은 청년 6명이 들어왔다. 순수창작집단 ‘스폰치’의 예술가들이었다. ‘스폰치’는 공공예술을 추구하는 ‘문화살롱 공’의 박이창식 대표가 기획한 작가 그룹으로 DMZ 생태사진가 김경훈, 설치미술가 하정수, 조각가 나규환, 미디어 설치작가 박준식, 영상작가 박상덕씨가 참여하고 있었다. “교동마을을 알게 된 건 앞서 한탄강 상류에 있는 연천 고문 2리에서 진행한 재인폭포상회 프로젝트를 하면서였습니다. 고문 2리도 수몰지역이었는데 당시에는 사라지는 것에 대한 기록을 목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죠. 철저히 작가적 입장에서, 확실한 목적성이 있었죠.” 박이창식 대표는 교동마을에 들어온 이유에 대해 ‘속죄의 마음’이라고 했다. “재인폭포상회의 핵심은 제 3자의 위치에서 당시 마을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남기는 거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삶에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죠. 그러다보니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마을 어르신들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더라고요.” 교동마을에서의 프로젝트는 고문 2리 때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됐다. 처음 마을에 들어왔을 때 박이 대표는 작가들에게 “예술을 하지 말라!”고 주문했다. 예술을 하러 들어온 작가들에게 예술을 하지 말라니, 작가들은 어리둥절 할 수밖에 없었다. “사라질 마을에 벽화를 그린다고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런 행위는 우리의 목적성만 있을 뿐 이곳 주민들에겐 아무런 가치도 없죠. 이 마을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새로운 마을을 어떻게 만들고, 그속에서 어떻게 적응하며 사느냐였죠.” 마을에 들어오면서 박이 대표는 예술의 목적성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공동체 마을을 만들어가는 과정 안에서의 기능적인 역할만 남을 뿐. 처음부터 교동마을 프로젝트는 ‘마을 만들기’가 마지막 종착지였던 것이다. 주민들과 갈등·화해 반복하며 더욱 돈독해져
작가들은 지난해 마을에 머물렀던 3개월 중 두 달 이상을 주민들과의 친분 쌓기에 쏟아부었다. 김경훈 작가는 집집마다 대표 야생화를 지정하고 초정밀 접사 사진을 찍어 주었고, 하정수 작가는 주민들에게 친숙한 소재를 이용해 주민의 모습이나 그에 얽힌 이야기를 테마로 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매사가 순탄치만은 않았다. “작가는 정말 열심히 용접 작업을 했죠. 그런데 전기요금이 4~5천원 나오던 것이 70만원이 나온거예요. 난리가 났죠. 결국 주민들께서 가정용 전기를 쓰지 말고 농사용 전기를 쓰라고 하더군요.” 전기요금 70만원에 그 세다던 작가의 자존심은 깡그리 무너져 내렸다. 이보다 더한 경우도 있었다. 주민이 직접 자신이 살 집을 구상하고 설계해 보는 ‘나의 집’ 프로그램은 박이 대표에게 깊은 좌절감을 안겨줬다. “지난해 ‘나의 집’ 프로그램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올해는 보다 구체화시키려고 유명한 건축가 선생님들을 죄다 모시고 들어왔죠. 정말 좋아하실줄 알았습니다. 근데 결과는 ‘깨갱’이었죠.” 급기야 설명회를 연 자리에서 마을대표와 건축가 사이에서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땐 정말 기금 반납하고 그만두고 싶었어요. 이젠 친해진 줄 알았는데…. 너무 앞서 나갔던 것 같아요. 주민들하고 함께 호흡하면서 보조를 맞춰나가야 된다는 걸 알았죠.” 프로젝트가 시작된 이후 박이 대표는 항상 군복 바지를 입고 다닌다. 밀리터리룩을 좋아해서도 작업하기에 편해서도 아니다. 그는 “항상 전쟁에 임하는 자세로 긴장하지 않으면 온전하게 프로젝트를 수행하지 못할 것 같아서 입는다”고 했다. 이들의 커뮤니티는 갈등과 화해를 반복하면서 더욱더 견고해지고 있었다. 자생력 위해 홍보 CF·효축제 등 개발 ‘한마음’ 이주대책만 있지 그 이후에 이 사람들이 뭘해 먹고 살지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어요. 큰 틀에서 봤을 때 국가에서는 구획정리해서 집 지어주면 끝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농촌은 그게 아닙니다. 이어질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해요. 그게 역사고 문화입니다.” 이수인 마을 대표의 말이다. 이주민들에겐 새 터전에 적응할 수 있는 자생력과 경쟁력이 필요했다. 교동마을만의 자산을 만드는 작업. 방향은 정해졌고, 작가들의 기량은 맘껏 발휘됐다. 댐 건설로 19가구만 남아… 창작집단 ‘스폰치’ 新마을 만들기 나서 2012년까지 새 터전 마련위해 도롱이집 이주 프로젝트·자체사업 구상 작업은 크게 두 방향으로 진행됐다. 도롱이집 이주 프로젝트와 마을사업을 만드는 것. 도롱이는 도롱뇽을 발음하기 편하게 만든 말이다. 도롱이집은 마을에 남은 최고령자 이수하(74), 김영자(71) 부부의 집이다. 노부부가 신혼시절이던 1950년대 말 지어 살아왔다. ‘ㄱ’자 형태의 한옥으로 50년 넘게 그 자리를 지켰다. 딱 하나, 새마을운동 때 지붕을 이엉에서 슬레이트로 바꿨다. 집도 부부를 닮아 마을에서 가장 오래됐다. “여기서 5남매를 키웠어. 10년 전 막내아들 장가보낼 때 막내며느리가 이런 데서 잘 수 있겠나 해서 이 집 옆에 조립식 방 한 칸짜리 새로 지었지. 왜 그때 이걸 헐지 않았냐고? 일루 와봐. 여기 이 대청마루. 이 마루를 없앨 수 없겠더라고. 여름에 말도 못하게 시원하거든.” 주민들은 새로 이전할 부지에 자신들의 땅을 한 평씩 내놓기로 했다. 그렇게 마련될 공공부지에는 바로 이 노부부의 집이 복원될 예정이다. 그 안에는 풍경부터 주민들의 일상까지 마을의 역사가 고스란히 옮겨지게 된다. 마을 사업으로는 이 마을이 전국 농촌체험마을 1호라는 역사성을 감안해 클라인 가르텔과 이바지 사업으로 결정됐다. 작가들은 두 사업에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들을 하나 하나 만들어 나갔다. 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이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도록 생태체험·염색체험프로그램 등을 개발하고, 마을을 홍보할 수 있도록 마을 CF와 영화를 제작했다. 또 이주 후 마을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효축제’를 기획해 잔치마을로써의 이미지를 살려 이바지 사업과 연계시켰다. 작가들이 주민들의 손맛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맛 기행’을 진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레시피를 영상으로 남겨 이바지 사업을 이어나가는 데 있어 마을 자산으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모든 콘텐츠 개발 작업은 작가와 주민들이 함께 합니다. 그래야 작가들이 빠졌을 때 주민들 스스로 운영할 수 있을테니까요.” 이 프로젝트는 3개년 계획이다. 이주가 완료되는 2012년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올해에는 영상의 정기현, 회화의 문미희, 문학의 지오씨가 가세했다. ‘커뮤니티 아트’, 공동체의 삶속에서 예술이 과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인 작가들의 계획은 성공할 수 있을지…. 어쨋든 기대를 갖게 하는 마을이다. 윤철원기자 ycw@ekgib.com 사진=전형민기자 hmjeun@ekgib.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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