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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돌아왔다] 5. 포천 장자마을 - 금단의 땅에 ‘배움 바이러스’ 신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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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돌아왔다] 5. 포천 장자마을
금단의 땅에 ‘배움 바이러스’ 신바람
1028252518_DpnSjZAL_fdc7c9a46ec149e19a3d278bac7f2b4ed8252912.gif2011년 07월 21일 (목)류설아 기자 1028252518_2zqusPdE_6e51cd4205fe21786c95c7ba5059ebe15eee433b.gif rsa119@ekgib.com1028252518_L0CMsqfa_e83060363f970df69d0c2d7ef0e816acdd0f28cf.gif
  
장자마을 행복학습관에서 공부하며 환한 미소를 찾은 마을 주민들.

소외의 삶 한센인·가족 당당히 세상밖으로

공부방·도서관 들어선 ‘행복학습관’ 열어

공무원·교수 등 주민과 생활 희망의 메신저


  
‘모든 국민은 평생교육의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받는다.(평생교육법 4조 1항)’·‘모든 국민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는다.(헌법 10조)’ 법이 보장한, 모든 국민이 누리는 기회와 권리다. 

이 당연한 것을 수 십 년간 생각조차 못했던 이들이 있다. 포천시 신평리 장자마을 사람들이다. 이 마을은 소위 ‘문둥병’으로 불렸던 한센병을 앓았던 환자와 그 가족들이 모인 곳이다. 현재 105명의 한센인과 30여 명의 비한센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끔찍한 병균 취급을 받으며 고향과 가족의 품에서 쫓겨나,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 속에 묻혔다. 

이후 그들은 자신의 병에 대한 열등감과 사회의 편견 속에 ‘나’를 숨기고 살았다. 그렇게 치열한 생존의식과 사회에 대한 경계심이 전부인, 표정없는 마을이 됐다. 이런 장자마을에 지난해부터 미소가 번지고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잘 사는 날이 올꺼야. 포기는 하지 말아요. 저 높은 하늘을 봐요. 우리는 꿈이 있잖아. 이리보고 저리봐도 우리 사이 좋은 사이. 잘살꺼야. 잘살꺼야. 우리 모두 잘살꺼야.” 장맛비가 쏟아지던 지난 14일, 문 닫은 낡은 공장건물 사잇길을 뚫고 도착한 장자마을의 ‘행복학습관’에서는 소문대로 합창단의 노랫말이 들려왔다. 한센인과 그 가족이기에 평생 숨죽이고 살았던 이들이,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기까지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병들었던 마을에 행복한 웃음 퍼져

  
지난해 2월 진행된 개강식에 참석한 주민들의 무표정에서 무관심과 경계심이 읽힌다. 

장자마을은 병든 ‘죄 없는’ 사람들이 모여 많은 ‘전과 기록을 세운 곳’이다. 병으로 얼굴이 뒤틀리고 손이 구부러지는 등 한센병을 앓던 이들은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한 공간에 모였지만, 먹고사는 문제조차 해결할 수 없어 불법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동안 ‘임진강 유역 배출시설 제한고시’ 때문에 공장 자체가 허가가 나지 않는 곳에서 생계를 위해 무허가 공장을 한 것이다.

“직업을 가질 수 없었어. 사람들이 접근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고민하다가 결국에 한 일이 선배들(기존 마을 사람) 따라 한 동냥이었지. 그렇게 7년을 살았는데 자식이 생기니까 더는 못하겠더라고. ‘동냥 자금’하고 빚 내서 축사를 만들었는데 그것도 외부 장사꾼들한테 놀아나면서 망했지. 축사를 개조해서 공장 임대를 시작했는데 수입원이 되더라고. 그럼 뭐하나, 정부 단속에 마을 사람들 빚내서 만든 공장이 텅텅 비어갔지.”

서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학년 때 한센병 발병, 안양 나자로 마을을 거쳐 일반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지난 1985년 장자마을에 정착한 최종국 이장(49)의 말이다. 신평장자산업단지 개발조합장이기도 한 그는 지난 세월을 돌이키는 순간만큼은 내내 당당했던 표정을 지운 채 굵은 눈물을 떨궜다.

“몇 년 동안 십 원짜리 동전하나 보지 못한 동네 사람도 있었어요. 살려고, 단속대상지에서 벗어나려고 마을 사람끼리 집행부를 꾸리고 환경부를 설득했죠. 경기도에서도 도와주면서 드디어 양성화가 됐어. 앞으로 더 어려운 일이 많겠지만, 이제 우리 마을도 살길이 생겼다니까.”

지난 2009년 5월 고시가 개정됨에 따라 오는 2013년 합법적인 산업단지로 조성될 계획이 진행 중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마을에 행복 바이러스가 퍼진 진짜 이유는 아니다.

막막했던 생계를 이어가고자 불법으로 유치한 염색공장 때문인 환경단속 이외에는 따뜻한 말과 그 누구의 접근도 없어, 고스톱만이 유일한 낙이었던 사람들. 그들이 ‘나’를 드러내고 ‘우리’가 되고 진정한 ‘공동체’를 구현하는 놀라운 기적의 시작은 모두가 누리는 최소한의 권리를 맛보면서부터다.



고통의 세월… 한글 배우고 춤 추며 치유

내가 간판을 읽을 줄 알아. 은행에 가선 이름을 적는다니까.”

30여 년간 이 마을에서 살고 있는 한경숙 씨(59·여)는 “딸들이 전화 목소리만 듣고도 엄마가 변했다고 말한다”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그의 밝은 표정은 장자마을 누구에게서나 찾을 수 있다.

“부모님이 차라리 죽어버리라는 말을 했었는데…그때 생각만 하면 아직도 억장이 무너져. 그런데 지금은 하루하루가 너무 바빠. 한글에 댄스에 합창에…. 배우다 보니 천 년 같은 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가버려.” 

16살 꽃다운 나이에 한센인이란 이유로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쫓기듯 소록도에 들어간 이춘자 씨(69·여). 그는 소록도에서 12년간 살면서 같은 한센인과 결혼, 사회 구성원으로 받아주지 않는 이들을 피해 장자마을에서 산 지 어언 40년이 다 되어간다.

이처럼 주민들의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에 행복 바이러스가 퍼진 것은 불과 1년여 전. 배울 기회조차 박탈당했던 이들을 위한 평생 배움터 ‘행복학습관’이 개관하면서부터다.

경기도는 지난해 ‘경기 행복마을 만들기’ 사업의 일환으로 교육적으로 소외받은 장자마을에 버려져 있던 복지회관을 1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공부방과 도서관 등을 갖춘 교육공간으로 리모델링했다. 이에 앞서 주민 대상 면담과 수요 조사를 하고 전문가팀을 꾸려 맞춤형 교육을 진행했다. 

우선 주민 화합 분위기 조성을 위해 레크레이션과 노래교실을 처음 운영했고, 2단계부터는 주민이 희망한 한글·요가·컴퓨터 강좌를 진행했다. 점차 교육 분야를 확대해 난타·아동미술·비즈 등 주민이 성취감과 자존감을 느낄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마을 형성 후 최초 마을 행사인 ‘신나는 마을캠프’를 통해 공동체 화합을 이끌어냈다. 현재 아주대와 대진대의 전문가로 구성된 팀이 행복학습관을 위탁 운영하고 있지만, 앞으로 주민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리더 양성프로그램도 함께 진행되고 있다. 이들이 오는 8월 마을을 떠났던 2세대를 행복한 고향으로 초대하는 마을축제를 마련할 예정이라니, 그 현장이 사뭇 기대된다. 하지만 주민이 처음부터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업 착수 초기에 마을을 찾은 공무원과 교수 등에게 경계심 가득한 차가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던 마을 사람들. 그들은 한글을 배우고 춤을 추며 함께 노래하면서 생존의 희망을 부여잡았던 순간보다 더 놀라운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평생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열고 외부인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최소 예산으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부가 창출된 것.



외부 사람들 힘 합쳐 ‘마음의 벽’ 허물어

  
지난해 말, 주민들이 복지회관을 리모델링한 행복학습관에서 배운 노래와 춤을 선보이고 있다.
아래, 주민들이 한글 실력을 뽐내며 기뻐하고 있다.
아름다운 변화를 이끈 원동력은 역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중 한 명이 김동근 도 기획행정실장이다. 김 실장은 마을이 불법 무허가 공장 천지였던 2009년 6월 도시계획국장으로 있으면서 ‘더 이상 규제 아닌 지원책’을 고민했다. 당시 공장 보일러 청정 시설 설치 아이디어를 냈다. 3개월 후, 김 실장은 교육국장이 됐다. 바뀐 자리에서 그는 ‘평생교육’으로 마을을 행복하게 만들자는 계획을 세웠다. 세부 내용은 공무원과 교수 등 10여 명의 전문가를 모아 매주 진행한 스터디를 통해 고민했다. 그리고 드디어 2010년 2월 8일 첫 현장을 방문하게 됐다. 

“스터디 초기에는 전문가들도 ‘전염되지 않을까’하는 고민과 부담이 있었죠. 저는 이미 도시환경국장을 하면서 접했기 때문에 함께 공부하면서 설득해 드디어 현장도 방문했죠. 처음 주민들 반응은 참담했죠. ‘뭘 또 귀찮게 하려고, 공부해서 뭐하겠어, 산업단지나 해서 그냥 잘 살면 되지.’ 이런 식이었어요.”

당시 첫 전문가 그룹 방문에서 공무원 단속과 자신을 피하는 외부인의 시선에 지칠 대로 지친 주민들은 무표정과 무관심으로 일관했다고. 전염률도 희박하고 초기발견 때 치료만 받으면 일반 피부질환자처럼 자유롭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한센병에 대한 사람들의 기존의 부정적 편견을 깨뜨리는데도 많은 시간과 설득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번엔 또, 상처받은 주민들이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이다. 

“뭘 배우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맨 뒤에서 한 남자분이 ‘컴퓨터나 가르쳐주쇼’하니까, 한 아주머니가 ‘배부른 소리 하지 마쇼. 난 한글이나 배웠으면 좋겠소’라는데, 그 말이 절박했어요.”

김 실장을 비롯한 전문가 그룹은 수차례 마을을 방문하면서 배우고 싶었지만 잘라진 손과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딴 사람들이 피할까 봐 마을로 다시 숨을 수밖에 없던 사람들을 위해 마음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장자마을 사람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주어졌다.

주민들의 닫힌 마음을 적극적으로 열어젖힌 것은 김규옥 대진대 교수다. 김 교수는 마을 코디네이터로 우선 주민들과 같이 자고 먹으면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도 처음에는 무섭기도 했죠. 그런데 한센인도 행복을 꿈꾸는 그냥 ‘사람’이었어요. 평생학습을 통해 열등감과 원망을 안고 있던 분들이 자존감을 찾는 자아를 형성하면서 삶이 바뀌었어요. 저는 단지 당신도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작은 몸짓으로 보여드렸을 뿐이죠.”

장자마을 주민을 ‘내 가족’이라며 겸손하게 말하는 김 교수. 그는 마을 주민이 스스로 자신을 인정하고 이웃과 관계를 맺고 마을 밖 사회에 손을 내밀게 된 변화는 결국 교육으로 ‘보통 사람’임을 모두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제 장자마을 사람들은 더는 한센인이라는 것을 숨기는 데 급급하지 않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마을안에 숨지 않는다. 그들은 합창단을 만들어 지난해 삼성 코엑스에서 열린 전세계한센인대회와 인근 한센촌에서 노래하며 희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행정상 규정된 한마을 사람이 아니라, 같은 상처와 행복을 공유한 공동체가 됐다. 그들이 마을 밖으로 걸어가려 한다. 진짜 마을, 진짜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려는 그들의 당당한 손을 마을 밖 사람들이 잡을 때다.

류설아기자 rsa119@ekgib.com

사진=전형민기자 hmjeon@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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