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 돌아왔다] 1. 프롤로그. ‘마을의 새생명’ 사라졌던 희망이 싹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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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돌아왔다] 1. 프롤로그 | ||||||||||||||||||||||||||||||
‘마을의 새생명’ 사라졌던 희망이 싹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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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우리의 마을 만들기란 말 속엔 마을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신념과 의지, 꿈과 희망 등이 절절하게 녹아있는 듯도 하다.
이제 우리네 마을 어귀에서 ‘○○마을 만들기 사업 시행’ 등의 입간판이나 현수막 등을 보는 것은 낯익은 풍경이 됐다. 아름마을, 정보화마을, 체험마을, 테마마을, 팜 스테이, 산촌유학, 오도이촌(五都二村), 그린 투어리즘 등등 열거하기도 버거운 마을 만들기 사업들이 산간 오지, 도서에 이르기까지 퍼져나갔다. 한 마을에 적게는 몇 억 원에서 많게는 70억~80여억 원의 자금이 투입돼 소위 ‘마을 숙원 사업’들을 하나하나 이루어내고 있다.
사실 우리나라 정부 부처의 마을 만들기 관련 사업들은 행정안전부, 농림수산식품부, 국토해양부 등 농산어촌 및 지역 정책 유관 부처뿐 아니라 교육과학기술부, 문화체육관광부, 환경부 등 범정부 차원에서 경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여기에 지자체 및 공공기관, 단체 등에서 개별적으로 추진하는 사업들을 보태면 그 종류와 규모를 정확하게 짚어내기란 쉽지 않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을 만들기’는 과거 새마을 운동이 그러했듯이 주로 ‘○○마을 만들기’ 식의 관주도 정책 사업들로 투영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들어 주민 주도의 자생적 마을 만들기 움직임들도 심심치 않게 보여 지고 있으나, 이들 또한 어떠한 방식으로든 제도적, 정책적 수단과의 결합과 타협 없이는 온전한 모습을 그려내기란 어렵다 할 것이다. 그러다보니 마을 만들기의 지향점 및 과정과 절차, 그 성과의 지속가능성 등을 설계함에 있어 제도적, 정책적 수단이 갖는 태생적 한계를 고스란히 넘겨받는 것은 물론 그에 더 나아가 마치 ‘강남의 귤을 강북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귤화위지·橘化爲枳)’는 말과 같이 오히려 그 관성의 영향이 더욱 심화되는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그로 인해 간혹 어떤 이는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성과 있음’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은 그 실질적 ‘성과 없음’을 지적하며 부작용의 폐해까지를 걱정하기도 한다. 그간의 ‘마을 만들기’ 성과에 대한 관점은 이해관계 등에 따라 다를 수 있겠으나, 지금까지 전국에 걸쳐 그 많은 사업들이 일어났음에도 오늘날 우리네 마을의 삶의 모습을 보면 성공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는데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지난 한 세기, 우리는 마을의 많은 것을 잊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성장과 발전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마을의 기억을 지워나간 그간의 흔적들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이제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선 그 곳으로 들어가는 기억의 지도를 짜 맞추는 지루한 퍼즐을 풀어내야 한다. 그렇다고 마을은 언제나 작고 가난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다. 향약, 두레, 품앗이를 읊조리며 격앙가를 부르는 그런 마을을 얘기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어디서건 마을에 사람이 살고, 마을과 사람은 서로를 닮기에 마을과 사람은 서로의 모습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마을을 만든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나 단기간의 인위적인 물량 투입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것도 아니며, 특정한 삶의 방식과 가치로의 일사분란한 통합을 강요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굳이 여기까지 가진 않더라도 마을 만들기를 얘기함에 있어 적어도 그 곳의 사람들과 그들의 삶의 가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문은 열려있을 필요가 있다. 박명학 예술과마을 네트워크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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