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이 알고 싶다] 대구 김영숙 센터장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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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태어나서 초중고대학교까지 마치고 활동도 대구에서 쭉 하고 있는, 대구 토박이입니다.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이 지역사회와 삶의 변화를 위해 만들었던 ‘참여광장’이라는 직장인 모임이 시민사회에서의 제 첫 활동이었어요. 1년 반 동안 대구시의회, 시의원의 활동을 감시하고 책자를 만드는 활동을 했었는데, 이때 대구라는 지역에 대해 애정도 생기고 전반적인 사회문제에도 관심이 많아졌어요. 그러면서 97년부터 대구사회에서 진보적인 시민운동조직을 만들자는 흐름이 있었고 참여광장을 대구참여연대로 전환했고 본격적인 권력감시운동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제 담당은 사회복지위원회였어요. IMF 때는 저소득 실직가정에 지원금을 주는 조례운동을 했었고요, 의약분업 때는 의사와 약사의 갈등을 시민의 입장에서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 정리도 하고, 이주노동자 연대 사업이나 버스요금인하운동 같은 것도 했어요. 시민의 삶에 직결된 문제들을 시민운동분야 뿐만 아니라 복지, 노동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모여서 정책적 대안을 만들고 제도화하는데 의미가 있는 활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Q. 마을공동체로 운동의 방향을 전환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참사 사건이 있었어요. 당시 유가족과 행정의 사이에서 시민사회가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유족의 요구, 시민사회의 제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반영되는 것 없이 참담하게 마무리되었어요.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요. 비가 장대같이 쏟아지던 장마철이었는데 천막이 부서지고… 많은 활동가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좌절의 경험이지요. 유족은 유족대로 지치고 시민사회도… 이런 처참한 현장의 모습에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또 행정과 대등한 관계를 맺기엔 시민사회의 힘이 굉장히 약하구나 하는 자괴감을 뼈져리게 느꼈죠. 한동안 시름에 잠겨있었어요. 과연 시민운동이 지역사회에 대안적 역할을 할 수는 있는지, 시민의 힘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었고…
이후 2004년도 총회에서 대구 참여연대는 새롭게 전략을 짰습니다. 권력감시운동은 그대로 하되, 밑으로부터의 풀뿌리 자치운동을 해보자고. 동구에 생활근거지를 둔 참여연대 회원을 중심으로 동구주민회를 만들었어요. 사실은 지금의 마을정책하고는 상이 달라요. 스몰 참여연대처럼, 구단위 행정감시였던 거죠. 그래서 사무실도 주민들이랑 동떨어져서 구청가까이에다 두고… 그러다가 ‘어?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이 번뜩 난거죠.
그 뒤론 주로 아파트 엄마들과 활동을 같이 했어요. 놀토교실도 하고, 자녀교육에 대한 강좌도 열고, 엄마들이랑 구의회 방청도 가고, 근처 장애인 야학과 협력해서 마을 축제도 열고. 그 중 가장 의미 있었던 성과는 그 장애인야학을 가는 길목에 있었던 아양교에 아치형 보도교를 철거했던 일이었어요. 동구청이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앞두고 15억을 들여서 아양교 위에 아치형 보도교를 만들었는데, 이게 경사가 너무 높아 장애인과 노약자는 다닐 수 없다는 사실을 야학에 다니는 휠체어 장애인의 이동경로를 보면서 알게 된 거예요. 2년 10개월 동안 주민들과 함께 축제나 1인시위같은 다양한 형식으로 철거운동을 했고, 결국 주민 동의 80%를 얻어서 철거됐어요. 처음 이 문제를 알게 된 날부터 철거공사가 시작된 날까지, 주민들과 함께하는 운동을 배웠던 중요한 기회였고 가장 많은 깨달음을 얻었던 일이에요. 누군가의 불편함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어떻게 해결할지 모두에게 물어보면서, 주민들과 길게 꾸준히 함께하는 방법을 배웠던 거죠.
Q. 그리고 선거에 나가신 건가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웃음) 사실 선거 이전에 저에게 중요한 키워드는 도서관이에요. 반야월 안심동에서 마을도서관을 만들어보자는 목소리가 있었어요. 마침 제 신혼집도 안심이었고. (웃음) 그때 엄마들 힘이 정말 대단하다는 걸 온몸으로 느꼈어요. 애들 재우고 아홉시, 열시에 회의하고, 980명 주민들한테 욕구조사하고, 공사비 인테리어비, 책구입비 다 캠페인, 후원행사로 직접 마련하고 하면서 1년 10개월 만에, 이것도 오래 걸렸죠, <반야월어린이도서관 아띠>도서관을 개소했습니다.
도서관을 만들면서 배운 게 있었어요. 행정에 기대면 안된다는 것. 작은도서관 정책 하나라도 제대로 맡아 정책을 확산하는 구의원 한명이 우리곁에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주민이 직접 후보가 되어보자는 얘기가 나왔죠. 하지만 역시 후보자가 된다는 건 생업을 접고 뛰어들어야 하니까, 활동가인 제가 만만하잖아요? 결국 제가 떠밀려서 나가게 됐어요. (웃음) 2010년 구의원 선거에 무소속 풀뿌리후보로 나갔습니다.
그때 내세웠던 공약 일순위는 아이들 안전하고 행복하게 키울 수 있게 마을마다 작은도서관 하나씩 만들자는 거였어요. 재밌게 선거운동 했습니다. 엄마들 자전거 타고 돌아다니면서 선거유세하고, 선거캠프 준비부터 운영까지 다 주민들이 직접 한 거에요. 결과적으로는 22.3% 득표하고 2인선거구에 3위로 떨어졌어요. 아쉽죠. 여전히 정당의 벽이 높구나 느끼기도 했고. 그래도 대구에 저 같은 풀뿌리 주민 후보가 세 명 나왔는데 한 명은 당선이 됐어요. 결과적으로 이 선거를 통해 가능성을 보기도 했고, 더 많은 과제와 책무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선거 끝나고 도서관활동을 주축인 주민들이 맡으면서, 저는 임대아파트에서 공부방을 운영하게 됐어요. 2011년도부터 2015년, 그러니까 센터오기 직전까지 방과후 마을학교를 했습니다.
Q. 대구시마을공동체지원센터는 어떤 과정을 거쳐 문을 열었나요?
대구센터의 설립에는 대구 시민사회의 흐름이 얽혀있어요. 참여정부 말에 광역지자체마다 공익지원센터를 만드는 정책이 있었는데 대구는 그걸 못 만들었어요. 매칭예산을 편성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우리가 이대로 끝낼 수는 없고, 차라리 민간의 힘으로 공익센터를 만들자고 해서 만든 것이 지금 대구센터의 위탁법인인 사단법인 대구시민센터입니다. 대구시민센터는 2009년 설립부터 지역사회에서 <공익예술전>을 통한 공익기금을 모으고 소액공모사업들을 진행해왔고, 이렇게 인큐베이팅 된 사업들이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며 힘을 모아왔어요.
한편으로 풀뿌리단체네트워크라는 활동가 모임이 있었어요. 마을공동체 활동가들이 모여서 시민센터에 교육도 제안하고, 함께 펀딩도 진행하면서 시민센터와 파트너쉽을 가졌던 그룹인데, 제가 여기 초창기 멤버로 4,5년간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그 동력으로 지금 센터까지 오게 된 거라고 볼 수도 있죠.
대구센터 설립 얘기는 민선 6기 시장님 선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나왔어요. 풀뿌리단체네트워크에서 서울시에서 실행하는 마을공동체 사업을 대구에서 하면 좋겠다는 제안이 있었고, 2013년도에 대구시민사회의 다양한 의견제안으로 의원발의를 통해 조례를 만들었고, 새로 취임한 시장님도 시민사회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려는 의지가 있어서 2015년에 위탁을 받아 대구센터가 개소됐습니다. 한마디로 대구는 센터가 있어서 마을활동이 잘 되는 게 아니라 밑에서부터 잘 엮여있는 강한 힘 덕분에 센터가 생길 수 있었던 거에요. 대구센터가 생긴다고 했을 때 다들 ‘으잉? 갑자기 대구에서 어떻게?’ 하신 분들이 많았는데 (웃음) 사실은 이런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이 오랫동안 있었어요.
Q. 인천남구의 유진수 센터장님은 대구의 시민사회와 마을운동의 분위기를 궁금해 하셨는데, 지금까지의 말씀들이 대답이 된 것 같아요. 혹시 ‘보수 지역 대구’에 대해 덧붙이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대구가 좀 그런 이미지들이 있죠? ‘고담대구’ 뭐 이런 말도 있고. (웃음) 하지만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고 불릴 정도로 해방기부터 사회운동이 활발했던 곳입니다. 인혁당 사건, 60년대 2∙28민주운동, 훨씬 이전 식민시대의 국채보상운동도 그렇고, 대구에는 시민들이 용기를 보여준 사건들이 많습니다. 활동가와 시민들은 대구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고 정신적 유산을 이어가려 하고 있어요. 다만 지역주의, 권위주의가 남아있는 행정이나 정치권 일반에서 시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하고 일방통행을 해왔던 거죠.
그래도 2010년~2014년도부터 굉장히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시민의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한 정치변화가 현실에서 반영되고 있고, 대구사회의 새로운 혁신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계속 올라오고 있습니다. 우리 센터는 이런 주민들의 다양한 욕구가 나타나는 과정에서 멍석을 깔아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거고, 시 행정에서도 시민사회를 비판세력이 아니라 대안세력으로, 민간위탁사업들을 하면서 새로운 파트너로 여기기 시작했어요. 파격적인 변화죠.
민선6기 들어 취임한 시장님도 개소식에 오셔서 ‘마을공동체는 주민주도’라고 강조하시더라고요. ‘공동체에 대한 의지가 강하시구나’ 하는 걸 느꼈죠. 내후년엔 마을, 도시재생 사회적경제, 공익, 청년 영역들의 협업공간이 조성될 예정이에요. 저희도 거기로 들어갈 건데, 시민∙공익에 대한 시장님의 정책의지가 시민사회의 인큐베이팅 공간, 협업공간으로 중기계획에서 실현됩니다. 올해 청년정책 분야에도 ‘청년도시(Youth Magnet City)를 표방하며 436억 정도의 예산이 들어갈 예정이고, 대구에서도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Q. 인터뷰 속 인터뷰! 유진수 센터장님의 궁금증을 따라 만나보았습니다. 대구 주민활동가의 목소리를 통해 대구의 실제 시민사회 분위기를 느껴보세요! #1. 마을방과후학교 와룡배움터 김종수선생님 와룡배움터는 10년 전 초등학교 학부모들이 같이 교육을 시켜보자 해서 만든 방과후 학교였습니다. 지금은 마을교육공동체를 표방하면서 마을 조직들의 허브공간으로 변화를 꾀하고 있고요. 10년동안 방과후 학교를 운영하면서 한때는 아이들이 30명까지 늘어났던 것이 아이들이 중고등학교 진학을 하면서 열명까지 줄어들자 취학 전 아이부터 어른들까지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마을교육공동체로 확장을 해보자 했던 것이 작년 입니다. 마침 대구센터도 설립이 되면서 마을비전학교, 마을의제사업 같은 것을 통해 저희의 계획들을 실현시키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서울 사례를 보면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는 편인데, 대구센터 통해서 선진지 견학도 가고, 사람들도 만나고 하니까 점점 힘이 커지고 있다는 게 느껴져요. 부산에서 사회적경제 공부를 하다가 처음 대구에 왔을 때는 고민이 있었어요. 함께 살아가는 관계, 공생의 관계들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들이 있었는데 마을에선 진보보수가 없어요. 다음 세대들이 행복한 삶을 만드는데 진보보수가 어디 있나요. 지속가능한 삶을 고민하는 거잖아요. 같이. 2004년 학부모회로 시작했어요. 아이들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와룡배움터도 만들고, 생협 활동을 같이 하면서 먹거리로 관심이 옮겨졌죠. 그러다가 아이들이 자라면서 모임 결속력이 떨어지는 시점에 반찬가게로 수익을 창출해보자고 새로운 일을 벌린 거에요. 2013년에 마을기업에 등록하고 지금은 만 3년됐습니다. 예전에는 ‘너네 애나 잘 키우지’ 이런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그러면 또 저도 ‘아 이거 그만두고 집에 더 있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했죠. 그런데 결국은 제가 하는 공동체 활동이 애들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치더라고요. 신랑도 앞치마 두르고 ‘어머, 오셨어요.’ 하는 현모양처를 원할 순 있겠지만, (웃음) 내가 부족한 건 인정을 하고 나의 활동들이 중요하다는 걸 자꾸 얘기를 하니까 삶을 바라보는 각도가 달라지더라고요. 그리고 작년에 마을기업 최우수상 상금 7000만원 받고 나선 좀 반응이 달라진 것도 있어요. (웃음) 직접적인 정치얘기는 피하려고 하긴 하지만 우리가 다른 반찬가게랑 좀 다르다는 게 보일거에요. 우리 밴드 멤버만 1200명인데 거기서 세월호 얘기가 나왔던 적이 있었어요. 어떤 사람이 댓글에다 ‘반찬가게면 반찬 얘기만 합시다’해서 논쟁이 벌어지고 그 사람은 밴드 나가고 난리가 난적이 있어요. 결국 그 분은 반찬이 필요하다고 다시 들어오셨지만. 저희는 반찬이 음식-땅-농민-운동 다 연결되어있는 톱니바퀴라고 보고 있어요. 그런 운동을 불편해 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설득하고 이해시키면 돼요. 크게 문제될 건 없다고 보고, 오히려 지역의 작은 단체들이 하는 공동육아, 이주여성 이런 건 사실 다들 필요한 거니까 기꺼이 창구 역할을 하려고 하죠. 대구에서도 이런 색깔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실제로 많이 확산되고 있기도 하고요. |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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