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강남 소녀’에 ‘벨기에 댁’이던 그녀, 정읍고창으로 간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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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방경은 메이플-스톤 공동체지원센터 사무국장
편집자 주: 전국 각지에서 마을을 일구는 주민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마을 중간지원조직 활동가들! 행정과 민간 사이에 ‘낀 존재'의 숙명을 가진, 그리하여 행정의 자원을 일선 주민들의 활동에 연결하고자 애쓰고 있는 사람들! 마을센터 활동가들은 어떤 지향과 고민을 가지고 마을로 향하고 있을까요? 살아온 ‘뒷 배경'과 살고자 하는 ‘미래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국마을지원센터협의회에서 전국 마을센터 사람들을 만나러 갑니다. 잘 알지 못했던 서로의 깊은 인간적인 진면모를 함께 나누고 교류할 수 있기를 바라며.
도회지 느낌이 나는 사람이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서울, 그것도 강남의 한복판인 서초에서 나고 자란 그녀였다. 비행기 타는 걸 좋아해 수년 간 ‘초콜릿’이 유명한 벨기에에서 일하며 살았단다. 한곳에 뿌리내리기보다는 ‘부평초’처럼 둥둥 떠다니는 삶을 꿈꾸기도 했었고, 눈치 볼 것 없이 일상을 사는 ‘이방인’의 삶도 나름 즐겼다고.
그렇게 세련된 ‘차도녀’(?) 같던 그녀가 ‘마을’로, 더군다나 도시도 아닌 농사짓고 사는 들과 산이 만발한 ‘촌’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떻게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모를 묘한 인연은 그녀를 ‘과거 커리어’와는 크게 관계는 없어 보이는 ‘마을 중간지원조직’으로 데려다놓았다.
그래도 이렇게 삶이 흘러오게 된 데는 모종의 이유와 사연, 내재된 배경 또한 분명 있을 것이다. 강남 소녀, 벨기에 댁, 영문학도, 해외마케팅업 근무, 제주도, 정읍과 고창, 메이플스톤 센터, 그리고 마을...... 무려 ‘세계’를 넘나드는 ‘방경은’이라는 사람 책을 지금부터 펼쳐보자.
호구조사부터 합니다! 마을 활동을 하시기 전에는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사실 저는 평탄한, 아주 유복하지는 않지만, 단란한 가정에서 살았고요. 서울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공부했던 사람이었죠. 크게 구김살 없이 자란?(웃음) 그런데 ‘활동’을 한다는 거, 사회운동에는 관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참여연대에서도 활동을 했었고, 한국-베트남 연계해서 가는 평화캠프, 예컨대 양민학살 있었던 곳에 가서 위령탑 세워주고, 아이들 학교 고쳐주는 그런 자원봉사도 다니고 해외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캠프에도 가고 그랬거든요. 외국에도 가보고 싶었고, 캠프도 재미있게 하고, 친구들도 사귀니까 갔었던 건데. 여하튼 사회에 대한 관심은 있었어요.“
대학생 때부터요?
“제가 자란 곳이 서초구였어요. 방배동에 있는 고등학교를 나왔고. 그러니까 거기가 저의 세상인 것 같았어요. 어쩌다보니 저희 집 옆에 강남역이 있었고, 정말 강남에 가까이 있었거든요. 많은 문화들이 막 쏟아지고, 그러던 곳이 바로 제 옆이었기 때문에, 제가 이른바 ‘중심부’에 있다는 것도 모르고 그랬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살면서 이렇게까지 변두리에 있었던 적이 없는 느낌이야(웃음). 지금은 이른바 ‘지방’에 있잖아요. 강남에서 나와 보니까 알게 된 거죠. 강남 서초구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지나보니까 그런 게 제 어린 시절이었고요. 대학교 다닐 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대한 관심과 갈증은 있었던 것 같아요. 이게 다인가? 내가 살아온 모습이 전부인가? 이런 물음들.”
전공이 뭐예요?
“영어를 했어요. 영미문학. 영어로 얘기하는 것을 좋아해요. 유창한 것이 아니라 스킬로서. 필요한 수단으로서의 영어. 저 이런 거 굉장히 애들한테 가르쳐주고 싶거든요. 한국에서는 너무 주입을 해버리니까. 저는 외국 애들이랑 캠프하면서 그런 걸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영어를 잘하지 않더라도 소통할 마음이 있으면, 나오는 단어 주워서 얘기할 거 아니겠어요? 이런 것들을 가지고 직업으로 찾은 것은 해외마케팅 일이었어요.”
해외마케팅이면 아까 말한 사회 참여나 이런 것이랑 전혀 관련이 없는?
“전혀 다른 일을 한 거죠. 사회 참여, 운동 그런 거는 밥벌이를 못할 거라는 불안감이 항상 있었던 것 같아요. 재밌기는 한데, 밥벌이를 못할 것 같다. 사실은 제가 해외마케팅을 하기 전에 출판사 일을 했었어요. 출판사에서의 경험이, 출판사 또한 밥벌이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웃음)”
해외 관련 어떤 일을 하신 거예요?
“정보통신 관련 회사였는데, 통신기기를 파는, 굉장히 고가의 장비를 파는 회사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영업 일을 했어요. 저는 영업도 영업이라 생각을 안했던 것이, 해외바이어들과 대등한 관계를 맺고, 애걸하듯 사주세요 하는 영업이 아니니까, 그런 관계들이 재미있었고요. 또, 이런 통신 쪽에서 전문용어를 쓰는 젊은 여자 직원이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 회장님은 저를 좋게 봐주신거 같아요. 무조건 가르쳐서 쓰면 사람들이 특이하게 보겠다, 이용했던 거지(웃음). 살아보니 어딜가도 꼭 절 이용하는 사람이 나타나더라고요. 여기 센터도 그렇고(웃음). 암튼 CEO들 앉혀놓고 영어로 PT하고, 해외도 많이 다녔고. 직장을 구할 때 막연히 비행기를 많이 타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는데, 진짜 그런 직업을 가져서 5,6,년을 정말 비행기를 많이 타고 다녔죠.”
결혼하기 전에?
“네. 그러다가 결혼을 하면서, 바로 유럽에 나가게 됐죠. 벨기에에. 결혼을 19일에 했는데, 25일에 나갔죠. 옷가방만 들고 갔어요.”
‘벨기에댁’이라고 부르던 말이 그래서 생겼군요.
“삼년 동안 유럽사무소를 개설하는 일을 했죠. 하다가 애기도 낳고. 벨기에는 정말 섬 같은 곳이었죠. 주변에 다 강대국이 있거든요. 우리는 그곳에서 진짜 섬처럼, 한국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까 이방인처럼, 때론 현지인처럼 조용히 살았죠. 그렇게 신혼을 오손도손 살았던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있어요. 그 때 이사를 3년 동안 3번을 다녔거든요. 해외에서 이사는 진짜 힘들어요.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까 우리가 다 옮겨야 하는데, 만삭에도 이사를 하고.
그러다가 터키로 발령이 나고. 벨기에에서 제가 유럽 전체를 담당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일이 벨기에나 영국에서 잘되면 좀 편했을 텐데, 먼저 계약이 터진 게 터키였던 거죠. 터키의 기업과 큰 계약을 했고 그래서 터키로 이사를 하고 거기서 일년 정도 일을 했어요, 유럽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심플하고, yes면 yes, no면 no인데, 여기 yes라 해도 yes가 아니고, no라 해도 no가 아닌? 그런 환경이 많이 힘들더라고요. 파트너며 일하는 사람들도 다 나이많은 남자들이고.. 너무 척박하고요. 삶이. 그때도 주변에 한국 사람은 없었고. 그때 마침, 둘째를 가지게 되었어요. 비행기를 탈수 있는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죠. 회사에다가는 육아휴직 및 출산휴가를 내고, 회사는 일년 줄 테니까 돌아와라. 그랬었어요. 1년 버티는 그 기간을 제주도에서 보냈어요. 사실 돌아오기 전에 터키에서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할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었어요. 다시 서울에서 해외마케팅일을 하고 싶진 않다. 가족과 계속 떨어져 있어야하고, 이렇게 돈 벌고 싶지 않다, 이런 생각? 그래도 먹고 살 순 있겠지, 이런 자신감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처음에는 외국에 많이 다니면서 일을 하고 싶으셨잖아요.
“그랬죠. 그런데 많이 질린 거죠. 아, 그런데 그 호텔! 당시는 질렸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리워(일동 웃음) 호텔 냄새가 있어요. 한 달에 일주일 이상 호텔 여기저기를 다니면, 진짜 딱 호텔방을 열면 나는 특유의 냄새가 있어요. 좋은 호텔이든, 그저 그런 호텔이든. 그런데 그거 맡는 순간 막 기분이 가라앉고 너무 힘들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사람이 되는 거지. 지금 보면 왜 그랬을까 싶은데, 그때는 그렇더라고요. 그런 일상이 지겨워지고, 원래는 해외 생활도 굉장히 잘 맞았어요. 약간 이방인으로 사는 거 좋아했거든요. 사는 곳에 불만이 없어져요. 난 이방인이니까. 한국 상황은 답답하지만 우리는 멀리 있으니까. 뭐 그렇게 부평초처럼 떠다니면서 살고 싶었죠. 그런데 막상 아기가 생기니까, 뿌리를 내려야겠다는 생각이 깊게 들었죠.
그래서 제주도를 선택했고, 임신 7개월이 지나면 의사가 비행기를 못타게 해요. 7개월에 터키에서 비행기를 타고 시댁인 정읍으로 와서, 일주일 머물다가 바로 제주로 내려갔죠. 아버님은 그냥 정읍에 살자. 가도 집 못 구한다. 염려 하셨는데 가자마자 집을 구했어요. 바다가 보이는 집을 구해서 애기를 낳고, 둘째가 8개월이 될 때까지 살았죠. 거기서 처음으로 변두리의 삶을 경험해본 거 같아요. 한국인데 서울이 아니다. 아무도 나를 모르잖아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그런데 말은 통하는, 한국인들과 사는, 그래서 제주도를 저는 그렇게 말하거든요. 말 통하는 외국이라고. 그런데 지금은 아니더라고요. 너무 어린 애기가 연년생으로 둘 있으니까, 막 겁이 났어요. 애들 중 한명이 아프면 어떻게 하지? 한번 제가 많이 아팠어요. 그런데 남편이랑 응급실을 갈 수가 없는 거야. 아이들이 자고 있으니까. 당장 누가 와서 도와줄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사는 건 좀 아니다 싶었어요. 그럼 다시 서울로 가느냐를 결정해야하는 시점이 된거죠. 육아휴직 기간은 끝나가고 있었고, 회사에서는 어떻게 할 건지 알려달라고 하고. 그런데 저는 일단 서울에서 그 전처럼 일을 다시 할 자신은 없었어요. 신랑도 마찬가지였고. 우리는 일종의 ‘프랑스적인 삶’, 10개월 일하고 2개월 쉬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던 차에, 이렇게 내려와서 살게 됐죠.
그럼 정읍이 시댁인건가요?
네. 시댁이에요. 신랑은 미꾸라지 양식업을 하고 있어요. 놀랍죠?(웃음) 정읍에 와서도 항상 돌봐주는 가족이 있는 건 좋았지만,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진짜 외딴 섬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그러던 차에 애까지 있으니까 정말 발목이 잡히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나는 뭐지? 이제 내 인생은 다 끝난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전에 생각했던 삶하고 많이 다르니까. 그러니까 죄없는 남편만 들들 볶아대는 거예요. 일이 한가해지는 겨울 되면 기분 전환하러 꼭 놀러가야 되고. 그런데 그것도 싫더라고요. 애기들도 아직 어리고. 그런 것들이 막 중첩되는 차에, 여기 있는 선희 언니를 만나게 된 거죠.
정읍에 와서 이분(선희 언니)을 만나기 전까지의 기간이 얼마 정도였던 거죠?
1년 정도? 가족은 옆에 있지만 서울을 떠나서, 애기엄마로서 한국에서 삶을 시작했던 정읍에서의 1년이 굉장히 힘들었어요. 언니를 알게 되었고, 위로를 많이 받았어요. 맘센터라고 하는 곳의 존재가. 그때 언니는 맘센터의 대표셨어요.“
아. 맘센터가 정읍에 아이들 공동 육아하는 곳?
“네 , 그냥 엄마들의 수다공간? 자치센터 안에 있는, 아이들 장난감 있고, 안 위험하게 벽에 스펀지 달고, 아이들이 놀 수 있는 19.5평짜리 공간이에요. 가서 애기 엄마들 만나고, 언니 만나고, 서로에 대해 얘기하는, 그렇게 조금씩 가까워지면서, 조금씩 지역사회에 발을 넣게 됐고 결국 이렇게 된 거죠.”
그럼 마을센터 일은 어떻게?
“센터는 정말 우연하게 제안을 받았어요.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을 안 했는데, 그거보다는,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 거라고는 생각 못했고, 처음 시작할 때는 살아갈 우리 지역을 알아가면 좋겠다. 너무 몰랐으니까. 아는 사람 많아지면 좋겠지, 거기다가 선희 언니가 강하게 그리 어려운 일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감언이설(웃음)에 아주 쉬운 일인 줄 알고 시작했죠.”
이 활동으로 오시게 된 거는 결국 사람이었네요.
“맞아요. 다시 나가서 사회 활동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그걸 옆에서 계속 북돋아주는 사람이 있었고, 그때 어떤 새로운 일을 만나게 됐고 이 일에 대해서 명확한 이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약간 막연한 생각이었지만. 그런데 옆에 할 수 있어, 해보지 않겠니, 그렇게 연결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 경력 증명서를 들고 가니 휴직기간이 경력에 포함되더라고요. 그래서 경력이 단절된 기간은 길지 않지만, 사회생활은 상당 기간 안했었기 때문에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새로운 분야였으니까요. 옆에서 북돋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처음에 여기서 무슨 일을 해야겠는지, 그런 다짐과 포부는 어떠했던 거 같아요?
“처음에 커뮤니티비즈니스(CB) 지원 일을 해서, 무엇인가부터 공부하기 시작했죠. 공부를 하다보니까 굉장히 좋았어요. 전에 게임회사, 미국에 있는 게임 스튜디오에서도 일을 해봤는데, 그런 일에 열정과 시간을 쏟는 게, 저는 일을 할 때, 그 일이 무엇이든 간에, 의미를 찾는 스타일이더라고요. 그런데 게임 같은 거에, 내가 하지도 않는, 빠져서 하고 있는 거 보면 한심해 보이는(웃음) 일을 하니까 별로 재미가 없었어요. 모바일 게임이 굉장히 융성하던 때라 월급은 많았거든요. 그 회사에서 한국 사무소 역할을 했는데, 서너 달에 한번 해외팀이랑 출장가서 만나고, 뭔가 오더가 있으면 그걸 가지고 와서 여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지금 생각하면 일도 아닌 거 같네(웃음). 그런데서 가치 충돌이 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의미 없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있었고 결국 길게 하지도 못했어요.
반면,지금 제가 하는 일은 의미가 쉽게 찾아지면서, 납득이 되더라고요. 그동안 내가 하고 싶었던 거랑도 맞으면서, 좋은 일이란 확신이 들고 더 잘하고 싶어서 스스로 학습도 하게 되고, 하면서 재미있게, 보람 있게 했어요. 힘들지만 재밌게, 재밌지만 또 힘들게, 나름대로는 치열하게 보냈던 것 같아요.“
메이플스톤 센터 얘기를 해볼게요. 이름이 독특하잖아요.
“메이플은 단풍, 정읍의 상징이고, 스톤은 고인돌, 고창의 상징이고, 공모사업의 이름을 특이하게 작명하다보니까 지어진 이름이었어요.”
센터는 어떻게 설립이 됐는지 배경을.
“12년도 전후에 농림부 공모사업에 연계협력사업으로, 지역발전위원회에서 행복생활권역사업으로 예산을 받았고요. 협력사업의 예로 중간지원조직을 양 시군이 함께 만드는 사업계획이었던 거죠. 중간지원조직 운영을 하는데, 정읍이 주무관청이여서, 정읍에 세우게 됐습니다.”
정읍이랑 고창이 똑같은 비중을 가지고 중간지원조직이 운영되나요?
“주무는 정읍이고, 고창은, 사업 범위를 따지면 6:4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정읍이 6, 고창이 4.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센터가 정읍에 있기 때문에, 어디에 있느냐가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을 하잖아요? 관계성 면에서 고창이 조금 힘든 부분이 있죠.”
지금 민간위탁 형태로 운영이 되는 거죠?
“민간위탁은 민간위탁인데, 저희가 완전하게 자율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요. 인사라던가, 활동가를 고용하는데 있어서, 완벽하게 자유의지로 운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요. 행정에서는 센터를 독립된 주체로 보지 않고 사업단을 본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하고요.. 민간 위탁 전에 센터가 설립된 것이 아니라서 좀 그런 부분이 없지않죠.
정읍 같은 경우에는 마을만들기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요?
“정읍은 농경문화지역이라고 봐야죠. 굳이, 제가 다른 지역의 상황을 몰라서 고창과 비교해서 말하자면, 정읍은 더 끈끈하고 공동체성이 강한 반면 폐쇄성(나쁘다는 뜻이 아니라)도 있어요. 고창은 그보다는 열려있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좀더 자신감이 있는 것 같아요. 고창은 외부의 영향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는 반면, 정읍은 약간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는 느낌.”
왜 그럴까요?
“고민을 해봤는데, 바다가 있어서 그런가? 고창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외부에 대해서 긍정적인 측면이 상대적으로 있어요.”
-옆에 있던 이대건 촌장(고창 책마을 해리) 첨언
“아마 실패의 경험에서 그럴 거예요. 기차역이 왜 정읍으로 가냐면, 고창에서 반대해서 정읍으로 간 거예요. 어디를 어떻게 기차역을 놓을 건가. 일본 강점의 경험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 착취당했었으니까. 그런데서 배운 거 같은 분위기. 그런데 오히려 정읍은 이미 다 열려있고, 열렸는데, 그게 그다지 변화가 없었고, 기차역이 열리면 오히려 지역 자원이 밖으로 빠져나갈 까봐 하는 정서가 있지 않을까요?
이어서 방경은 대답
“그렇죠. 그게 큰 거 같아. 그게 과연 우리 삶에 플러스가 될까? 마이너스가 될까? 지역사회가 잘되는 건 좋지만, 또 그게 정읍 사람들이 외부 영향을 더 많이 받게 되니까? 그런데 재밌어요. 비교를 하면, 그리고 신기한 건, 서로 이상하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웃음). 고창 분들은 정읍 사람들 되게 특이하다고 얘기하고, 정읍 사람은 고창 사람을 그렇게 보고. 제가 볼 때는 비슷한 게 많은데(웃음).
둘이 사이는 좋아요?
“그럼요. 예를 들면 양쪽 지역 다 양반인 것 같아요. 기본정서상 점잖고 그런 게 있어요. 막 거세게 목소리 이렇게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예를 들면 정읍과 고창 사람들이 같이 있을 때 막 항의를 하고 싶으셔도, 우선은 참으시는 거. 고창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안하고. 그런데 정읍 사람들끼리만 계시면, 한분이 목소리가 커지면 다 같이 커지시거든요. 이게 뭐야 그러시면서(웃음) 고창도 마찬가지로 그래요. 그런데 정읍고창 같이 섞여 계시면, 놀랍도록 조용해져요. 진중하게 토론이 진행 되요. 고창 분도 계신데, 먼저 얘기해도 될까요? 이러시면서(웃음). 서로 친해지시는 것도, 서로 예의를 지키면서 친해지시니까 보기가 좋더라고요.”
정읍이랑 고창, 둘 다 농촌마을 형태가 짙죠?
“그렇죠. 그래도 정읍은 나름 도농복합도시예요. 공단도 있고. 상업단지 같은 것도 조성되어 있는데, 대부분은 농촌이고, 일부는 거주지역으로 되어 있고. 고창은 농어촌지역이죠.”
센터에서는 주로 농민들을 많이 만나시는 거예요?
“센터에서 공동체 유형은 두 가지로 나뉘어요. 창업 공동체와 마을 공동체인데, 마을 공동체는 진짜 마을, 자연 부락에서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데, 그러면 대부분 농촌지역이 많고, 조금 드문 케이스로 동 자치위원회가 있고. 창업공동체는 사는 곳이 달라도, 셋이 같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으면 ‘셋이 하나가 되는 결사체다’로 보는 것이 창업공동체거든요. 이분들은 동 지역에 많죠. 젊은 사람들도 많고, 하고 싶으신 것도 많고.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정읍은 창업공동체가 아무래도 동지역에 많은데, 고창은 면 단위에 굉장히 흩어져 있어요. 그래서 주민들 간에 네트워크가 굉장히 잘되어 있으니까, 그 안에서 큰 차원의 창업공동체라고 그럴까? 면 단위로 이어가는 그런 모습들이 나타나죠.”
사회적경제 등 경제적인 활동도 많이 같이 하고 있나요?
“그럼요. 사회적경제에 대해서는 우리는 단계별 지원을 하기 때문에, 처음에 발굴했던 분들 중에서 조금 더 현장화 시키고, 제대로 그 사업을 할 수 있게끔 연결하는 과정을 도와드리려고 해요. 그런 것들이 어떻게 보면 사회적경제로 편입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센터의 역할인 것 같고. 어느 정도 해보겠다는 공동체가 있으면 협동조합으로 가겠다든가, 아니면 예비사회적기업가 육성 프로그램으로 들어가신다든가, 그런 것들을 저희가 연결을 하고, 그에 맞는 교육 등을 진행하고 있어요.”
정읍하고 고창, 두 지자체를 같이 묶어서 활동했을 때, 따로따로 하지 않고 묶어서 했던 취지라든지, 묶어서 했을 때 나타났던 효과, 그런 것이 있을까요?
“첫째는 시장이 넓어지는 효과? 정읍만 하면 작아요. 고창은 더 작아요. 최소한의 시장은 있어야 이 안에서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는가. 점점 인구는 줄어들고 있는데. 그렇다고 줄어들고 있으니까 합쳐서 한 개로 만들자, 이런 건 아니지만, 단위들이 서로 교류할 수 있는 게 많아져야 된다는 거죠. 이 안에서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는 규모가 커진다. 그리고 바라보는 눈이 정읍만 놓고 봤을 때랑, 고창만 놓고 봤을 때랑, 정읍고창을 같이 놓고 봤을 때 더 큰 주목의 효과가 있더라. 저도 어디 갔을 때, 메이플-스톤하면 아 정읍고창? 이렇게 되는 것처럼, 정읍고창을 한데로 묶어서 나오는 시너지가 외부의 홍보 효과로도 이어질 수 있잖아요.
게다가 각 지역 주체들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효과가 훨씬 커져요. 정읍시에서만 했을 때는, 안에서 계속되는 경쟁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서로 일어나면 인사하고 계속 만나는 사이이기 때문에. 그런데 고창까지 넓어지게 되니까, 이 안에서의 경쟁이 서로를 도와주는 형식으로, 또 관계를 뛰어넘는 교류가 되더라고요. 마을의 폐쇄성이라는 것이, 하나의 자원을 서로 나눠야하기 때문에 폐쇄적이 된다고 누가 얘기를 하던데, 마을은 굉장히 폐쇄적인 공간인 측면이 좋든 싫든 있어요. 농촌마을은 푸근하고 열려있고, 따뜻한 곳일 줄 알았는데, 막상 그 앞에 길을 갈 때도 허락을 받아야 지나갈 수 있고 그럴 정도로. 정주된 환경에서 자원이 정해져 있는데 외부와 교류가 일어나면 이걸 또 쪼개야 되는 그런 걸 우려했던 면도 있는 거죠.
요새는 그런 게 아니잖아요. 여기에만 있는 자원을 쓸 것도 아니고, 계속 교류하고 섞어야 하는 유통의 시대가 되었는데, 결국 넓게 마을을 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거죠. 그렇게 보니까 정읍고창 규모는 되어야겠더라. 정읍고창만 되도 해보니까 힘들지만 커버할 수 있어요. 그런데 부안까지 합치는 건 모르겠어요(웃음) 원래 정읍고창부안을 하려고 했었는데 안 된 거였거든요, 원래 생활권 자체가 정읍고창부안을 하나로 보는데.“
메이플스톤, 지자체가 두 개잖아요. 중간지원조직이 거버넌스에 대해서 어려워하고 갈등을 겪는 경우 까지 있는데요. 두 개의 지자체를 한꺼번에 상대해나가기 힘들지 않았나요?
“지금은 현실적으로 구조상 고창의 역할이 많이 미약해요. 그래서 힘들었던 것 같아요. 제가 볼 때는, 고창이 조금 더 목소리를 키우고 투입하는게 커지면 좋을 것 같은데요. 예를 들면, 정읍시청에서 무언가를 요구했을 때, 우리는 정읍고창을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정읍만을 위한 센터가 아니다. 고창에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런데 아무리 주무관청이라고 해도 지금은 정읍에서 훨씬 더 많은 주장을 하죠. 솔직히 고창은 예산을 아주 조금 투입했고, 사람도 그렇고, 정읍시는 마을간사라고, 센터에 추가 인력투입을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고창은 추가 인력 지원이 없었어요. 이런 입장에서 대응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고창도 적극적으로 조금 더 투입을 해준다면, 우리가 정말 중간역할을 잘 할 수 있을텐데, 그 점은 아쉬워요.”
두 개의 지자체 간 중간지원에 대한 균형이 맞지 않는 게 힘들었다는 말씀이시죠.
“그렇죠. 그리고 또 힘들었던 것은 아무 사전 활동이나 지식이 없이 센터에서 일을 시작했다는 거, 안 해본 사람이랑 해본 사람이랑 같이 일을 하면 아무래도 해본 사람의 목소리가 더 커지잖아요. 그런데 온갖 경험을 정말 바닥에서, 진흙탕을 구르다보니까 이제는 누가 무슨 얘기를 해도, 제가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거 같다는 느낌을 받는 거죠, 무슨 자신감인지(웃음). 처음이랑은 상황이 조금은 다르죠.”
중간지원조직이 결국에는 행정과 민간 중간에 낀 존재라는 말도 있고, 그런 고충이라든지, 그런 걸 나름 해쳐나가는 선생님만의 노하우가 있을까요?
“양쪽의 얘기를 많이 들어주는 거예요. 계속 듣다보면 뭐… 동의하는 줄 알죠(웃음). 그래서 한참 듣고 나서 그런 건 이렇지 않냐 얘기하는 거죠. 말을 많이 하면 자기도 모르게 필요 없는 얘기가 나오게 되잖아요. 아무튼 충분히 이야기를 할 기회를 주고, 결정을 하면, 그렇게 하든, 그렇게 안 하든 조금 언쟁이나 문제가 덜 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민간과 행정 가운데 중간지원조직이 있지 않나 생각을 해요. 우리가 그 사이에 끼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하나. 그냥 우리가 양쪽에 필요한 존재가 되면 되지 않은가. 그러면 저희를 통해서 해주세요~가 아니라, 그냥 양쪽에서 찾는 존재가 되면 좋겠다 정도? 꼭 우리를 통해서 민간과 접촉하게끔, 우리를 통해서 행정에 접촉하게끔 하는 것은 조금 주제넘은 것 같고. 그래서 낀 존재라는 생각은 내려놓으려고 하고 있어요.“
그럼 말을 잘 듣고, 말을 잘 안 하는 스타일이에요?
“네. 저는 말을 많이 안해요. 아주 피곤해요(웃음) 아 오늘 말 진짜 많이 한다.”
활동하면서 우리가 자랑하고 싶다 하는 활동이 있다면?
“오늘 이 자리, 사회적 경제학교라고 해야 할까(웃음), 센터협의회나 전국센터들과 같이 공동 하는 거, 지역의 역량 강화가 되고 있다고 보고요. 코디네이터 위촉했던 거. 창안대회라는 시스템이 공동체를 발굴하는 프로그램이에요. 그러니까 뭔가 아이디어를 가지고 오시게끔 독려하고 그렇게 아이디어가 나오면, 실제로 해볼 수 있게끔 교육하고, 연습하도록 지원하고, 그렇게 해서 어느 정도 강화된 역량을 가진 공동체들, 리더들이 생기면, 그분이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활동해나도록 해야 하는데.. 사실 무언가 해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계속 해나가는 분들도 있지만, 그냥 창안대회 참여. 거기까지였던 분들도 계세요. 그렇더래도, 거기까지라도, 축적된 경험들이 있고, 의지가 있다고 하면, 이런 비슷한 걸 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게끔 심화 교육을 한거죠. 그래서 마을 상담사나, 마을 코디네이터 제도를 정읍고창에서도 한번 해보자. 그래서 워크숍을 했고요. 퍼실리테이터라던가, 워크숍을 기획하거나, 현장에 마을 조사를 나가는 것이라던가 이런 것들을 통해서 실제적으로 현장에서 활용까지 가능하도록 했고. 가능하다면 그런 활동을 통해서 우리가 하는 일들을 이해해주셨으면 또 좋겠고요. 그래서 예비활동가들을 양성하고 나아가 모두가 중간지원조직이 되는 것. 그런 것들이 센터에서 중점적으로 하려고 했던 부분이었죠.”
이제 마을이나 공동체를 바라보는 관점이 많이 달라졌나요?
“전에는 마을이란 생각이 전혀 없었죠. 정말 마을에 산다던가, 지역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거든요. 저는 서초동에서 20년 정도를 살았어요. 그런데 제가 어디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본 적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이제 알죠. 커뮤니티를. 아직 아파트에 살고 있지만, 정읍시에 속해있다는 거? 정읍시의 작은 마을들, 그 안에 있는 관계들로 지역사회가 돌아가고 있구나. 전에는 안보였던 것들이 이제는 보이기 시작했죠.”
지역에 있는 센터의 입장에서, 협의회가 어떤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는지?
“저는 지역에 힘을 주는 일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 이번에 센터장 연수 많은 분들 와주셔서 개인적으로 힘이 되었거든요. 기라성 같은 분들(?)이 한꺼번에 움직여서, 지역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들한테도 큰 힘이 되어주고, 다른 공동체 리더들이나 활동가들 상황도 듣고 서로 힘받는 시간이랄까, 어떤 의지가 되니까, 이런 활동을 계속해서 해주셨으면 좋겠다. 그래서 예산이 허락하는 한, 그러기 위한 실질적인 네트워크를 위한 예산을 16년도에 각자 조금씩 잡아보던가, 그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저희 센터도 분담금을 냈잖아요. 사실은 어떤 명확한 목적이 있었으면 해요. 분담금을 꼭 내야만 하는 이유, 우리 센터가 센협에 꼭 가입되어 있어야 하는 이유 같은 걸 함께 찾아가고 싶어요.
글, 사진: 송주민
녹취록 정리: 류민수
진행 도움: 이대건, 이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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