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고흥까지 내려가 위장전입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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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에서 다시 농민 자격 조건을 갖춰야만 농가 주택을 지을 수 있습니다."
"공주에서 농사 지었던 것이 적용되질 않는다는 겁니까? 어떻게 이런 거시기한 법이 다 있데요?"
농가 주택을 짓기 위해서는 다시 농지원부를 취득해야 했습니다. 전남 고흥에서 다시 농민의 자격 조건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지요. 본래 충남 공주에서 농지원부를 취득한 상태였기에 전남 고흥에서는 따로 농지원부를 만들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농림수산식품부의 '농가주택' 담당자의 말에 따르면 농가주택 건축은 농사를 짓고 있는 그 주변 지역에서만 허용된다는 것이었습니다(이 기사를 쓰기 위해 자동응답이 반복되는 농림수산식품부에 일곱 차례에 걸쳐 전화한 끝에 농민의 자격에 대해 원론적인 말만 반복하는 직원에게서 겨우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농사도 짓지 않고 농가주택을 짓는 가짜 농민들을 사전에 막기 위해 방책일 터인데 타 지역으로 이주해 계속해서 농사를 짓고자 하는 농민들에게는 참으로 이상한 조항이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고흥에서 농민의 자격을 갖춰려면 집 지을 터에 먼저 농막 형태로 컨테이너라도 설치해 놓고 주소를 이전하여 다시 농민의 자격을 갖춰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컨테이너에다가는 주소를 옮길 수 없다 하니, 형식주의 때문에 번거로운 일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새 터를 구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분이 걱정 마라며 일단 자신의 집으로 주소를 옮기라 했습니다.
"우리 집에 주소를 옮기소. 어차피 농사지으면서 살 거 아니오?"
"그렇죠. 농사짓는 거 돈 안 된다고 못마땅해 하는 마누라와 다퉈가면서 지으려 하는 농산디요....."
"농지원부를 만들려면 이장 도장과 마을 운영위원들의 도장이 더 필요한데 내가 얘기해 놓을 테니 걱정 마소."
아무 생각 없이 주소를 옮겨 놓고 농지원부를 발부 받으면 그만인데 공연히 찜찜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나 같은 경우는 '위장전입'이 아니라고 위로했지만 결국은 주소만 옮겨 놓고 생활을 하지 않는 '위장 전입'의 모양새였으니까요.
집 짓기를 준비하고 있던 그 무렵(2009년 가을), 좀 더 경쟁력 있는 자식들을 만들고자, 혹은 세금을 물지 않기 위해 위장전입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총리며 검찰총장이며 장관 내정자들이 텔레비전에 뻔뻔한 얼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그들의 위장전입은 다 지나간 과거사라며 그들을 변호하는 한나라당 정치인과 보수신문들까지, 속 뒤집히는 장면들이 연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과 기록이 수두룩한 대통령이 꿰 차고 앉아 있는 정부가 위장 전입자들을 영입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나는 '그런 인간들과 다르다. 자식들을 경쟁이 덜한 곳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하고 개발 염려가 없어 땅 값 오를 이유가 없는 그런 곳에서 살기 위해 잠시 주소를 옮기는 것뿐이다. 본래 농사를 지어왔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농사를 지을 것이기에 농민의 자격은 당연히 취득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지만 여전히 찜찜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당장 불합리한 법을 고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민주화의 역사를 거꾸로 돌려놓고 있는 상식 이하의 정부에서 상식 이하의 법 조항과 대면하고 있다 보니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주소를 옮겨놓는 기간이 한 달이든 두 달이든 그 집에 눌러 살지 않고 어쩌다 우편물이나 찾아가는 전입이기에 '위장전입'은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장관이니 총리니 하는 뻔뻔스런 위장전입자들과 한패거리가 된 듯해 기분이 참 더러웠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농민주택관련법
하지만 공주집,안방에서는 빗물이 줄줄 새고 있어 당장 집을 짓고 이주해야 할 처지였기에 어쩔수 없이 주소를 옮겼습니다. 말하자면 '위장전입'을 했던 것입니다.
뻔히 농지원부를 지참하고 농사짓던 내가 타 지역에 살기 위해 '위장전입'을 하지 않으려면 따로 전세방이라도 얻어 놓고 가족들과 떨어져 농사를 지어가며 농지원부를 먼저 취득해야만 했습니다. 그게 번거로우면 일반 주택을 지어 놓고 나서 정식으로 주소를 옮겨 농지원부를 취득해 농가주택을 다시 지어야만 했습니다.
이도 저도 싫다면 농림수산 식품부의 '농가 주택' 담당자 말대로 일반 주택을 지으면 그만 이었지만 농가주택보다 일반 주택에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농가주택 건축은 그나마 농민들에게 주어진 혜택인데 그걸 저버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농가주택 건축 허가 사항이 얼마나 앞뒤가 맞지 않는 농민 관련법인지를 증명해 주는 조항이 있습니다. 농민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 농민으로 인정되어 귀농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지역에서의 농민 자격을 인정한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농가주택 건축허가 사항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농사 지었던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요? 복잡한 조항을 만들어 놓고 순박한 농민들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거둬들이려는 속셈이 아닐까요?
결국 농민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농가주택을 건축해 농사를 짓고 살려면 위장전입 아닌 '위장전입'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여 사리사욕을 위해 위장전입을 밥 먹듯 하는 인간들이 그 법을 만들어 놓은 게 아닐까요? 농가주택을 마련해 농사짓고 살아가려는 농민들이 어쩔 수 없이 위장전입을 하게끔 하여 자신들과 무늬가 같은 동일범으로 만들어 놓으려는 더러운 속종이 깔린. 설마 그런 이유는 아니겠지요?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농지원부를 취득해 서른평 미만으로 허용되는 농가주택을 지을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할 무렵 목수인 막내 동생이 인도에서 돌아왔습니다.
"형수님, 저 왔어요."
언제나 헤벌쭉 웃으며 다가왔다가 맑은 미소 남겨놓고 훌쩍 떠나곤 했던 동생이었습니다. 동생은 목수이면서 수행자이기도 합니다. 동생이 집 마당으로 들어서자 한창 설계 도면에 코를 박고 있던 아내는 뛸 듯이 반겼습니다.
"삼촌, 때맞춰서 잘 왔네요! 터 구해 놓고 이제 막 집지으려고 하는데."
"그래요? 잘 됐네요. 그런데 어쩌죠. 바로 떠나야 하는데. 비자 문제로 잠깐 나왔어요."
그동안 인도 다람살라에서 달라이 라마 선사 곁에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몇 년이고 눌러 살면서 깊이 있는 경전 공부에 몰두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막내 동생과 함께 처가에 쌓여 있는 목재를 정리하기 위해 경기도 여주로 올라갔습니다. 동생은 집을 지어 주겠다는 큰 처남과 머리를 맞대고 기초 공사에 관한 의견을 나눴습니다. 처남은 나름대로 일반적인 공법으로 시행하는 기초 공사비를 반으로 절감할 수 있는 새로운 공법을 제안했습니다. 사실 건축에 관해 깡통인 나로서는 모든 공법이 새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철 모양의 블록을 쌓고 거기에 철근을 박아 콘크리트를 부어 기초를 다지는 공법이라고 하는데 문제는 그 블록 한 개의 무게가 장정 한 사람이 겨우 들 수 있을 정도로 무겁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고' 소리가 뼈 속으로 파고들었지만 어쩌겠습니까? 집을 지어 준다는 사람이 그러자 하는데. 나는 짐짓 자신만만하게 말했습니다.
"까짓 거 하면 되지요 뭐. 죽었다 생각하고."
"두 분이 힘들어서 안돼요. 그걸 언제 다 쌓겠어요? 제가 있는 동안 도와 드릴 수 있는... "
동생은 둘이서 작업하기는 힘에 부친다며 일손을 나눠서 할 수 있는 다른 공법을 제안했습니다. '아이고 살았다' 싶었는데 처남과 동생의 서로 다른 공법이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지켜보다가 내 입에서 그만 '아이고 골치 아파 죽겠네'라는 소리가 툭 튀어 나왔습니다. 동생과 처남은 이구동성으로 말했습니다.
"집 짓다 보면 다 그래, 골치 아픈 일이 어디 한두가지겠어. 이제 시작인데 벌써부터 골치 아파 하면 어떻게 하셔."
꿔다놓은 보리자루처럼 뒷전에 멀뚱멀뚱 맥 손 놓고 쭈그려 앉아 있다가 집 짓는데 필요한 목재를 정리해 놓고 공주로 돌아왔습니다.
막막한 기초공사, 성질 급한 아내가 한번에 해결
그날 기초공사를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기초공사를 하기 이전에 동생이 먼저 집 지을 현장을 찾아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에 앞서 동생의 후배인 댕기머리 이윤구씨가 찾아왔습니다. 오래 동안 동생과 한 팀이 되어 목조주택을 짓기도 했던 윤구씨는 30대 후반의 젊은 목수입니다. 그는 한옥도 여러 채 지어 본 경험이 있고 10여 년에 걸쳐 목조 주택만 서른 채 가까이 지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주 별난 사람입니다. 땅, 물속, 하늘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사람입니다. 집 짓는 일 뿐만 아니라 스킨 스쿠버에 패러글라이딩, 스키 강사 일까지 하고 있습니다. 수년 전 갑작스런 폭설로 그가 우리 집에서 이틀 동안 발이 묶인 적이 있는데 때마침 쌀이 떨어졌었습니다.
그때 작은 도로, 큰 도로 할 것 없이 폭설에 뒤덮여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윤구씨가 스키를 타고 면 소재지에 나가 쌀을 사오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틀 동안의 신세 갚음을 하겠다며 동생과 함께 대여섯 사람이 둘러 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근사한 밥상까지 짜주기도 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그 밥상을 통해 그의 따듯한 마음 씀씀이를 가슴 깊이 새겨놓고 있었습니다.
"그때 형님이 폭설 내린 상황을 생중계 하듯 오마이뉴스에 올렸잖아요. 그리고 곧바로 영국에서 사는 사람이 내게 전화를 했었죠. 오마이뉴스에 올라온 기사보고 전화 한다고."
"그랬죠. 그때 인터넷의 위력을 실감하기도 했었지요이."
"근데 집은 언제 짓기로 했습니까?"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요. 처남이 늘 바쁘니께."
늘 일손 바쁜 처남이었기에 당장 집을 지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맘먹었을 때 지어야 하는데."
"먼저 컨테이너 박스를 갖다 놓을까 싶기도 한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냥 그러고 있어요. 동생이라도 있으면 좋은데 곧바로 인도로 떠나야 하고."
성질 급한 아내가 나섰습니다.
"그럼 윤구씨가 지어 주면 안 되나?"
"오빠 분이 지어 주신다고 했다면서요."
"아이고 언제 지어줄지. 큰 오빠 일이 워낙 바빠서요. 삼촌도 곧바로 인도로 떠날 거고. 그냥 윤구씨가 지어 주세요."
"에이, 안 돼. 그 돈 가지고는 택도 읎어. 삼천만 원가지고 어떻게 삼십 평짜리 목조주택을 짓는다고 그랴. 염치도 없이."
아내는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윤구씨를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집 지을 자재는 오빠가 준다고 했으니까 그 돈으로 어떻게 안 될까요?."
"안 될 거 없지요. 돈이 부족하면 나중에 주셔도 되고요."
어떤 일이든 겁을 내지 않고 막무가내로 추진하는 아내만큼이나 윤구씨 또한 대책 없는 제안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빚이든 빚지고는 못사는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아이구 그걸 어느 세월에 갚으라구."
"나중에 벌어서 주시면 돼죠."
"그건 서로 부담되는 일이니께 이렇게 합시다. 뼈대에 지붕까지만 올려 주시고 나머지는 내가 짓는 걸루."
"아이고 형님,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아요."
"아직 개집 하나 반듯하게 지어 본적이 없지만 까짓 거 배워가며 하면 되질 않겠슈."
"못할 것은 없지만 처남 분이 목재 주신다고 했으니까 그 돈으로 어떻게 맞춰 보기로 하죠. 하다보면 다 하게 돼 있으니까 한번 시작해 보시죠? 형님도 옆에서 거들어 주시면 되잖아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내가 그에게 '아이구 고맙습니다' 해야 할 판국에 오히려 그가 나를 설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얼떨결에 집짓기를 시작했습니다. 그가 짜 준 고마운 밥상에 둘러 앉아 밥을 먹다가 이런 저런 아무런 계획도 대책도 없이 반찬 얘기하듯 그냥 저냥 꺼낸 얘기가 시발점이 되어 집짓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식구의 경제사정을 빤히 알고 있는 그였기에 자신이 챙겨야 할 인건비를 대폭 삭감해 가며 두 팔 걷어 부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나서 며칠 후, 인도 행 비행기 표를 예약해 놓은 동생과 함께 전남 고흥으로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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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집 지을 자리를 정해야 했습니다. 동생과 윤구씨는 측량기를 이용해 대지로 지목된 여기저기에 팻말을 꽂아 가며 집자리를 정하고 지면의 경사도 등을 측정했는데 눈으로 보는 것보다 경사도가 훨씬 높게 나왔습니다. 집 자리를 중심으로 높은 곳은 까내고 낮은 곳은 단단히 메워가며 평탄 작업을 할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집 짓는 목수들답게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했습니다. 집이 들어설 자리, 서른평 공간을 정해놓고 곧바로 굴착기 기사를 수소문해 다음날 터파기 작업을 예약해 놓았습니다.
그날 저녁, 면 소재지로 나가 집을 짓는 동안 밥을 대놓고 먹을 만한 적당한 식당을 찾다가 고흥 군내에 숙소를 잡았습니다. 다음날 새벽, 일찌감치 숙소를 나서는데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오면 터파기 작업이 어렵기에 굴착기 작업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숙소에서 얼굴을 마주친 노동자 서너 명이 새벽 일터로 나서고 있었습니다. 밥집에서도 이른 새벽 서둘러 식사를 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30대의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없이 밥을 먹습니다. 우리도 별말 없이 밥을 먹습니다. 우리들처럼 그들 모두에게는 가족들이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족들을 위해 뭔가의 일거리를 찾아 남쪽 끝 전남 고흥까지 왔을 것이었습니다.
온몸을 밑천 삼아 노동의 일판으로 나서기 위해 새벽밥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 아직 장가를 가지 않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외아들이거나 일찌감치 결혼식을 올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딸이나 아들이 있거나 혹은 아들 딸 남매를 두었거나 할 것이었습니다.
타지에서 여기 저기 숙소를 옮겨 다니며 막일을 하고 일주일이나 열흘 후쯤에 일당을 받아 홀어머니를 위한 고기 몇 근, 혹은 자식들 기뻐할 선물 꾸러미를 싸들고 지친 몸을 감춰가며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갈 것이었습니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들에게도 집이 있을까? 집을 장만하려면 얼마나 더 힘들게 몸을 굴려야 하는가? 제 집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이 즐비한 세상에서 제 집 짓는다는 것이 새삼 사치스럽게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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