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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상상력, 미래를 바꾼다 - 3 도시는 이미지, 예술가에게 꿈의 제작소를 허락하자[한산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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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상상력, 미래를 바꾼다 - 3
 도시는 이미지, 예술가에게 꿈의 제작소를 허락하자
 [2007-12-10 오전 10: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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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초의 미술 인큐베이트 베를린의 베타니엔.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지'다. 그리고 그 본질에는 아이디어, 이른바 창작 활동이 존재한다."(베타니엔 국제예술문화교류 책임자 크리스토퍼 타냐트)

최근 전 세계적으로 예술작품 뿐 아니라 도시에 이미지를 입히는 작업이 한창이다.

윤이상,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등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한 통영 역시 시민들과 함께 도시 일상과 예술을 접목하는 작업들이 한창이다.

아트타일 보도블록, 김춘수 꽃시비, 윤이상·청마·초정거리, 동피랑 골목벽화, 예술가 버스 승강장, 거북선 맨홀뚜껑….

정형화된 문화공간 조성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면에서의 문화 상상력을 발휘, 타 도시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

하지만 정작 예향 통영의 화려한 명성 이면에는 고군분투하는 지역 작가들의 피눈물이 존재한다 .

4백년 전통을 이어온 인간문화재와 장인들이 천시당하고, 창작공간이 없어 쫓겨 다니는 예술가의 슬픔이 있는 곳 또한 통영이다.

통영은 미래 이미지를 위해 과연, 우리시대 예술가들에게 꿈의 제작소를 진정 허락 했는가?

과거가 살아있는 세계 최초의 예술가 스튜디오 '베타니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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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클레스 갤러리 전시장.
“예술가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 올리고, 꿈을 꾼다. 우리는 단지 예술가들의 실험을 도울 뿐이다”

세계 최초의 예술가 스튜디오 독일 베를린 '퀸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

150년 전 고성(古城)으로 출발, 빌헬름 4세 시절인 1950년 병원으로, 지금은 다시 예술가 스튜디오로 변신했다.

하지만 1961년 베를린 장벽 근처에서 총 맞아 죽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이곳은 1968년 병원이 문을 닫으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질 번한 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예술가들의 점거(Squat)로 살아남아 세계적인 창작 실험실로 성장했다. 

거주 기간 1년 동안 오로지 작업에만 전념, 창작비로 한 달에 1천200유로(150만원)가 지원된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은 미술 시장에 소개되지 않는다.

그러기에 전위적이거나 실험적인 성격이 강하고 오로지 외국작가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현재 만 27-40세 청년작가 17명. 한국의 이문주씨를 비롯 포르투갈, 슬로베니아, 캐나다. 우크라이나, 터키, 네덜란드, 노르웨이, 싱가포르 작가들이 상주해 있다.

베타니엔 국제예술문화교류 책임자 크리스토퍼 타냐트씨는 "1975년부터 지금까지 국제교류를 지향하고 있다. 이는 국제적인 작가를 베를린으로 모으는 것"이라 했다.

7년 이상 활동한 작가를 엄선, 신선한 아이디어를 무장시키고 이들이 미술 시장에 진출, 세계적 명성을 얻으면 베타니엔 또한 명성이 저절로 올라간다는 논리다.

그리고 예술가와 더불어 큐레이터 상주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작가가 예술적 영감을 쏟아낼 때는 기술자라 불리는 전문가의 도움도 받을 수 있는 유연성도 보였다.

상상을 초월한 실험적인 작품들도나왔다

루마니에에서 온 작가는 전시장에 보드카를 끓이는 장치를 설치, 14일간의 전시기간 동안 관람객들과 보드카를 마시느라 구급차에 실려 가기도 했다.

또 다른 작가는 바퀴벌레 경주장을 작품으로 만들어 이른바 ‘꾼들’끼리 배팅하는 과감한 실험을 벌여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결국 아무도 예술이라 인정하지 않은 '미친 생각'을 '지식 테러의 장'으로 승화시킨 베타니엔은 무명작가 850명을 세계적 거물로 생산해냈다. 

그리고 독특한 건물과 함께 전 세계 스튜디오의 '마스터 클래스'로, 매주 수요일∼일요일 오후 개방 시간에 맞춰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도깨비 건물 타클레스 예술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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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클레스의 자유분방함을 보여주는 작품들.
한국이었으면 벌써 도심 속 흉물이라고 제거(?) 당했을 것 같은데, 예술인촌이라니?.

옛 동베를린 장벽 옆 도심 한 복판에 유령처럼 서 있는 타클레스 예술촌.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건물벽면 전부가 강렬한 색과 선, 낙서로 둘러싸인 그라피티(graffiti)다.

1907년 백화점으로 문을 열었다가 한때 프랑스 전쟁포로를 감금했던 공간으로, 급기야 연합군의 공습으로 폭탄세례를 받아 폐허가 됐다 예술가들의 점거로 실험적 예술촌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서 베를린의 베타니엔이 비교적 잘 짜인 프로그램으로 작가를 발굴, 지원하는 것에 비해 동베를린의 타클레스는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각국의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었다.

타클레스 운영 담당자 칼레드 케하우씨는 "누가 언제 그렸는지 모른다. 아마 놀러 온 사람들이 했겠지." 타클레스의 자유로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대답이었다.

허름한 건물 속 어두운 조명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크라피티를 올려다 보며 계단을 오르니 30개의 창작 스튜디오와 2개의 갤러리, 그리고 연극과 영화 상영장이 나타났다.

칼레드 케하우씨는 “해마다 1∼2백명의 작가들이 입주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입주 작가는 거의 외국인들. 흥미로운 것은 운영이 상당히 느슨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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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와 대화중인 기자단.
전기세 관리비 명목으로 1㎡ 당 4유로를 받는데, 일반적인 공간이 150∼200유로인 점을 감안하면 지극히 상징적인 금액이다.

24시간 개방된 건물은 작가들이 알아서 이용하면 된다. 자유롭게 창작실을 개방하고 전시는 물론 아트 상품까지 판매, 한국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회화 설치조각 사진 의상 음악 등 각 분야 예술가들이 저마다 작업 중인 가운데 콜롬비아 작가 르네 아규얼레씨는 "이질적인 삶을 체험하기 위해 8년째 상주하고 있다"며 "특이한 구조로 여러 나라 작가와 교류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베를린을 찾는 관광객이 첫 발을 내딛는 곳이 타클레스 임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던진다.

교과서 예술인을 팔고 있는 통영, 작가들에게 꿈의 공장을 허락하자
베타니엔과 타클레스는 색깔은 다르지만 세계 각국의 예술적 영감을 주는 베를린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리고 창작 스튜디오라는 명목으로 베를린이라는 도시 이미지도 함께 팔고 있다.

통영은 현재 어떤가.

한국 연극계의 대부 유치진, 청마 유치환, 아동극작가 주평, 연극인 한하균, 꽃의 시인 대여 김춘수가 무대에 오르고,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이 곡나팔 소리를 들고 음악적 영감을 떠올렸다는 98년 역사의 봉래 극장을 무너뜨려 주차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서양화가 염주옥이 창작공간을 잃고 쓰러지는 슬픔을 겪었다.

또 4백년 역사의 통제영 12공방 후예들인 인간문화재와 장인들을 홀대, 시목 임종안 선생은 부산으로 떠났다.

통영연의 김휘범 선생은 고령의 나이에도 제대로 된 작업실이 없어 윤이상페스티벌 하우스를 비롯 여기저기 전전긍긍하다 구 소방서 건물에 둥지를 틀었으나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 없는 실정이다.

조선시대 3대 소반으로 이름을 날리던 통영소반의 추용호 선생은 몇 번의 물난리로 대를 이어오던 소중한 연장과 책, 그리고 목재들이 훼손돼 시에 도움의 손길을 펼쳤으나 외면, 작품 제작에 열의를 잃고 결국 병원에 실려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이 뿐 아니다. 사재를 털어 건립한 전혁림 미술관과 통영옻칠미술관 역시 관광객이 쉽게 찾을 수 있는 표지판이나 이정표도 제대로 없다.

물론 작가를 전문적으로 배양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도 전무하다.

그나마 옻칠미술관은 풍해문화재단과 통영RCE로 옻칠전문가 양성 프로그램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10년째 복원 중인 국가지정의 통제영 12공방 역시 현재로서는 인적 자원 활용과 운영 프로그램 계획조차 없다.

50년이란 세월을 투자, 고향 통영에 예뿌리 민속박물관을 건립하고자 했던 이영준·염경자 부부 역시 통영의 텃새로 결국 충북 제천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피눈물을 흘린 사연은 너무나 유명하다.

언제 쫓겨나갈 지 모르는 연명예술촌 20여 작가들의 쉼없는 전시와 다양한 교류전이 통영시를 향한 묵언의 시위임을 시는 아는가?.

이제 교과서에 나오는 유명 예술인은 물론 지역에서 묵묵히 이미지를 창출하는 작가들에게 꿈의 제작소를 제공하자.

신도시 팽창에 따라 도심 속 빈 공간으로 남은 구 교육청·경찰서·윤이상 페스티발(구 통영군청) 등을 통영만의 아트 팩토리(예술공장)로, 지역민과 아이들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과감히 허락하면 어떨까.

그리고 더 늦기 전에 통영나전칠기, 갓, 대발, 소목, 두석 등 12공방의 후예들을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할 때이다.

원문고개 안의 예술가들도 소중히 여기고 되돌아 봐야 할 시점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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