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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돌아왔다] 8. 안성 복거마을 - ‘호랑이 사는 미술마을’ 한때 반짝...지속적 운영 방안 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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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돌아왔다] 8. 안성 복거마을
‘호랑이 사는 미술마을’ 한때 반짝...지속적 운영 방안 절실
1028252518_jAUMtwDf_3277a9c269bd9f5951bf4704e59ab85694b02524.gif2011년 08월 11일 (목)윤철원 기자 1028252518_bUZkCJS3_ad59f3a0ba0b24bc2d557c17120ecb2074bd9fae.gif ycw@ekgib.com1028252518_DIXOvFU6_ce99f280c4e7da9fd712a3695b6d760f16f4a25d.gif
  
폐농기구와 드럼통으로 만든 쇠호랑이. 마을 입구에 떡하니 앉아 마을을 지키고 있다.

  
안성의 복거마을은 호랑이 마을로 유명하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작은 골목 귀퉁이, 담벼락과 지붕 위, 눈을 두는 어디에나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았다. 알록달록 호랑이가 집집마다 지키고 있는 곳.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져 오던 전설 속의 호랑이를 다시 마을로 불러온 것이 바로 ‘살기좋은 지역만들기 사업’이었다.

■ 2007년 당시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와 지역균형발전위원회 등의 주도로 ‘살기좋은 지역만들기 사업’이 전국적으로 펼쳐졌다. 떠나는 농촌에서 돌아올 수 있는 농촌이 되기 위해 주민들 스스로 지역실정에 맞춰 주거환경 등 삶의 터전을 개선하자는 취지였다. 

살기좋은 지역만들기 사업은 자연적, 지리적, 환경·행정적인 여건을 갖춘 마을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그 결과 당시 행정자치부는 문화체험형, 관광형, 생태체험형, 산업형 등 테마별로 전국의 30개 시범마을을 선정해 지원했다. 복거마을도 그 중 하나였다.

  
마을주민들이 직접 오색달록한 꽃 그림을 담장에 그려넣고 있다.
복거마을의 옛 지명은 복호리였다. 마을 뒷산의 모양이 호랑이가 엎드려 앉은 형세라 해서 붙은 이름. 이후에 마을의 풍요를 기원하는 바람을 담아 복거리로 불리다 지금의 복거마을이 됐다.

이 마을은 120여가구 300여명의 주민이 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여느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주민의 대다수는 60~80대 노인들이다.

2007년 당시 안성에서 벌어진 살기좋은 지역만들기 사업은 복거마을 단독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안성시는 복거마을을 비롯해 양협·금광·신기·동신곡·구송동·홍익마을 등 7개 마을을 하나로 묶어 ‘안성마춤 Community Art Town’ 건설을 표방했다. 사업은 국·도·시비 등을 합쳐 무려 65억여원이 투입됐으며, 7개 마을 이장들로 구성된 ‘두리마을운영위원회’가 조직됐다.

  
사업은 각 마을별로 테마에 맞게 추진됐다. 복거마을은 ‘아름다운 미술마을 만들기’가 테마로 정해졌으며, 공공미술프로젝트를 진행할 사업주체는 마을 인근에 위치한 대안미술공간 소나무(관장 최예문·기획감독 전원길)가 맡았다.

2009년 내내 진행된 프로젝트는 외지인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던, 조용하기만 하던 마을에 젊은 예술가들과 대학생들이 북적이면서 활기를 불어넣었다.

■  “이 녀석이 우리 마을 복덩어리여, 이 녀석을 보러 멀리에서부터 사람들이 찾아온다니까.”

복거마을을 찾은 지난달 29일, 마을회관 맞은편 은행나무 옆에 자리 잡은 쇠호랑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회관 앞 벤치에 앉아 있던 할머니 한 분이 자랑하듯 말을 건냈다.

이 쇠호랑이는 폐농기구와 드럼통으로 만든 유승구 작가의 ‘호랑이를 기다리며’라는 제목의 작품이었다.

마을 안내를 위해 직접 나와준 최예문 대안미술공간 소나무 관장에 의하면 이 조형물이 처음부터 주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 작품이 이곳에 놓이기까지는 우여곡절이 있었죠. 이 작품이 이번 프로젝트의 백미였거든요. 작품을 설치하는 날 대부분의 마을분들이 나와서 구경할 정도로 기대가 굉장했죠. 그런데 작품을 크레인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을분들의 항의에 부딪혔죠. “이런 쓰레기로 만든 걸 여기에 두는 게 말이 되는냐”는 거였죠.”

  
결국 긴급회의가 열렸고, 프로젝트가 완료되는 시점인 오프닝때까지의 반응을 보고 존폐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다행히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고, 지금은 마을에 들른 외지인들이 빼놓지 않고 기념사진을 찍고가는 마을의 보물이 됐다.

이처럼 복거마을에서의 공공미술프로젝트는 다른 곳과는 달리 하나부터 열까지 마을 주민들과의 논의를 거쳐 진행됐다. 그 이유에는 기획감독으로 프로젝트를 총괄했던 전원길 작가의 기획의도가 숨어있었다.

“어차피 작가들은 주민들에게 있어 객(客)입니다. 언젠가는 떠날 사람들인거죠. 저희가 떠나면 남는 건 마을주민들뿐입니다. 프로젝트가 수십년동안 아니 몇 대를 걸쳐 지켜온 그분들의 고향을 낯설게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죠.”

호랑이 조형물- 프로젝트의 백미

마을 주민들 그림그리기 ‘즐거웠던 추억’ 

때문에 프로젝트가 끝난 뒤에도 주민들에게 마을을 온전하게 돌려주기 위해서는 주민들이 직접 아이디어도 내고, 주민들이 직접 작품에 참여하는 ‘공동작업’이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교육’. 전 작가의 의도대로 작가들은 작품을 만드는 것 대신 주민들에게 그림 그리는 법을 가르쳤다. 평생 농사만 지어온 주민들의 손에 농기구 대신 크레파스가 쥐어줬고, 땅을 일구는 것이 아니라 도화지에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자기네 마을을 위해 애쓰는 작가들이 고마워 마지못해 수업에 참여했던 주민들도 자신이 그린 그림이 벽화로 둔갑하는 것을 보면서 차츰 자신감을 얻어갔다.

4개월여 가까이 이어진 그리기 교육은 작가들과 주민들이 소통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됐고, 프로젝트도 탄력을 받았다.

  
 
마을 곳곳에는 고양이인지 호랑이인지 귀여운 표정으로 포효하고 있는 녀석부터, 금방이라도 벽을 뚫고 튀어나올 듯 으르렁거리는 녀석, 지붕 위에 올라 ‘쫓던 닭’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녀석, 낡은 담벼락에 기대어 구부정하게 담뱃대를 물고 있는 녀석까지, 공동작업으로 소환된 형형색색의 호랑이들로 채워졌다. 또 평소 돌보지 않던 두엄 자리에는 아트벤치가 설치됐고, 볼품 없던 담장은 알록달록한 벽화들로 새 옷을 입었다.

■  프로젝트의 진가가 발휘된 것은 그 이듬해였다. 2010년 호랑이해를 맞아 복거마을은 대박을 터트렸다. ‘호랑이가 사는 미술마을’로 알려지면서 사진 동호인이나 여행객들의 발길이 줄을 이었고, 각 방송사들도 연일 분주하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이처럼 프로젝트는 대성공이었다. 하지만 성공과 함께 해결해야할 문제점도 도출됐다.

“당시에 매스컴을 엄청 많이 탔거든요. 그런데 그때마다 저를 부르시는 거예요. 인터뷰를 해달라, 재연을 해달라 하면서요. 기꺼운 마음으로 도와드리면서도 걱정이 됐죠. 주민들 스스로 해나가셔야 하는데 하는.”

아름답게 꾸며진 마을을 활용할 수 있는 인재를 키워내지 못한 것. 이 부분은 프로젝트가 남긴 가장 큰 오점이자 어쩔 수 없는 한계로 작용했다.

“처음부터 인재 개발을 염두해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작가집단이 나왔을 때 마을이 자생력을 가지고 제2, 제3의 프로젝트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마을안에서 그만한 일을 할 수 있는 인물들이 필요했거든요.”

하지만 전 작가의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오래된 마을일수록 대를 거쳐 오면서 오래도록 쌓여온 역학관계라는 게 존재합니다. 이 관계는 마을의 질서를유지하는 순기능이 있지만 때로는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밖으로 나서는 것을 주저하게 만드는 통제력이 발휘되기도 하지요. 또 젊은층들은 이 질서에 포함되는 것을 꺼려합니다. 프로젝트에는 얼씬도 안했죠.”

“그냥 건드리지 않는 게 좋다”며 손사래를 치는 전 작가의 모습에서 그가 했을 마을 주민들과의 힘겨웠던 신경전이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그렇다고 시도조차 안한 건 아니었다. 지난해에는 마을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마을지도자과정을 개설·운영했다. 하지만 결과는 대실패, 마을에서의 참가자는 단 한명도 없었다.

“(일)손이 바쁜데 어떻게 가느냐”는 한 할머니의 말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마을 주민들에게 있어 프로젝트는 이미 자신들의 삶과는 별개가 되어 버렸다.

전 작가는 “예술가들이 마을에 들어가서 단기간에 공공미술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접근 방식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며 “특히 전통마을의 경우 주민들 사이에 쌓여 있는 벽을 허물 수 있는 이전과는 다른 마을의 소통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제 마을회관에 모인 마을주민들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대부분은 이미 프로젝트 그 이전의 삶으로 돌아갔다. 함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닌 고스톱판을 벌이던 그들의 일상으로.

■ 이 프로젝트가 주민들의 삶 속으로 파고들어가지 못한 데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을 사업 선정이 프로젝트와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진행됐기 때문이다.
“태생적인 문제가 있었던 겁니다. 대개의 경우 마을별로 마을사업이 운영되는 게 일반적인데, 복거마을의 경우는 다른 6개 마을과 묶이다 보니까 프로젝트와는 상관없이 공동기반시설에 대부분의 예산이 투입됐죠.”

프로젝트 당시 복거마을 이장을 맡았던 지성기 전 이장은 마을 사업 선정에 있어 당시의 한계를 인정했다.

그렇게 해서 각 마을별로 옹기체험장, 자전거 인포센터, 체육공원 등이 조성됐으며, 복거마을에는 방앗간이 세워졌다. 더군다나 방앗간 운영 주체는 두리마을운영위원회였고, 복거마을주민들에게는 별 이익을 주지 못했다.

지 전 이장은 “마을의 상황에 맞게 보다 세심하고 철저한 분석을 통해 마을 사업을 정했어야 했다”며 “복거마을의 경우 지금까지 수만명이 찾아왔지만 식당도 없고 쉴 곳도 없어 관광객들이 왔다 그냥 돌아가는 게 문제”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급기야 최근에는 마을 사업들이 적자에 허덕이게 되면서 두리마을운영위원들이 대거 사퇴를 하기에 이르렀으며, 이에 안성시에서는 공모를 통해 위원장을 선출할 계획이다.

“그림 그릴 때가 제일 재미있었어. 눈도 어둡고 손도 떨려서 힘들기는 했지만 정말 좋았어. 늙은이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김순옥 할머니(76)은 프로젝트에 대해 ‘즐거웠던 추억’이라고 했다. 김 할머니의 ‘즐거웠던 추억’이 남은 여생에도 계속 이어지는 진정으로 살기좋은 복거마을이 되기 위해서는 안성시와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  

윤철원기자 ycw@ekgib.com 사진=하태황 기자 hath@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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