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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돌아왔다] 7. 이천 부래미 마을 - 녹색농촌체험마을 운영하면 변화..‘주민’ 우선 원칙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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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돌아왔다] 7. 이천 부래미 마을
녹색농촌체험마을 운영하면 변화..‘주민’ 우선 원칙으로
1028252518_Z7jdSGXc_025d33c38b0b7e00e23221aa5344d6a94d9269f6.gif2011년 08월 04일 (목)류설아 기자 1028252518_Ze36lFwE_fc122ba8fa2706581a4f216dab8ad509189de809.gif rsa119@ekgib.com1028252518_AacnbY1t_feea9168659ba53a7130080a79eb5ce5dd8c315a.gif
  


정부와 지자체, 농민 등은 1990년대부터 중장년층만 남은 농촌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한 다양한 정책과 사업을 진행했다. 지금까지도 전국의 많은 농촌마을이 농외소득을 올리며 삶의 질도 확보할 수 있는 다채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천시 율면 석산 2리의 ‘부래미마을’도 그 중 하나다. 기자는 그 농촌개발 바람이 한창이던 5년여 전, 그곳을 찾아더랬다. 

그리고 지난달 31일, 이제는 전국에서 농촌생태체험마을의 롤 모델로 손꼽히는 부래미로 다시 갔다. 부래미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지 기대감을 안고서….

■ 부래미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마을 어귀에 부처 형상을 한 바위가 있다고 해서 ‘불암리(彿岩里)’로 불렸다. 

세월이 흘러 발음이 변해 ‘부래미’가 됐다. 

수 년전 주민들이 마을 방문객에게 풍요로움과 아름다움이 찾아오기를 바란다는 의미를 부여해 지금의 ‘부래미(富來美)’라는 한자를 붙였다.


마을이 새로운 뜻의 이름을 갖기까지는 여느 농촌과 다를 바 없었다. 젊은이들은 떠나고 중장년층만 남은 주민에게 농업 외 소득은 없었다. 

급격한 고령화로 농사만으로는 더는 생업을 잇기 어려운 처지에 직면했다. 

이때 직거래 유통이라도 하려면 직접 재배 과정을 봐야 신뢰할 수 있고, 그렇다면 고객이 자연스럽게 마을을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다다른다.

그러던 2002년 어느 날, 정부와 지자체 주도로 농촌 살리기를 모토로 유행처럼 들끓었던 다양한 정책과 사업에 부래미도 뛰어들었다. 농촌체험마을을 해보자는 주민회의를 시작한 것.

“생전 농사만 짓던 분들에게 체험마을로 운영하면 농외소득을 올릴 수 있다고, 보이지도 않는 것을 하자고 설득하는 게 당연히 힘들었죠. 당시 벤치마킹할 다른 마을에 데리고 가서 직접 보여주며 설명했어요. 마을 어르신들도 반신반의하면서도 따르기로 동의해줬죠.”

지금까지 주민위원장으로 마을 변화를 이끄는 이기열 씨(66)의 말이다.

그를 비롯해 정체된 마을 살리기를 고민하던 뜻있는 마을 사람 모두 뜻을 모아 농림부에 녹색농촌체험마을을 신청, 2003년에 선정된 것이다. 이는 마을 변화를 일으키는 씨앗이 됐다. 

이 씨앗을 땅에 뿌리를 내려 열매를 얻기까지는 부래미가 안성 이씨 집성촌이라는 태생이 중요한 거름이 됐다. 

평균 나이 58세의 70여 명이 사는 부래미는 서로 설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가족 같은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돼 있었던 것. 수년간 여남은 가구가 외지에서 부래미로 왔는데, 이들도 곧 누군가의 ‘형님’이고 ‘언니’가 됐다고. 

일명 ‘안머슴’으로 불리는 이상택 총무(58)는 “돈이 오가는 사업이면 어디나 누구든지 시기와 다툼, 오해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우리 마을도 마찬가지였죠. 그런데 가족은 싸워도 또 서로 보잖아요. 다행히 부래미가 그런 점 때문에 단합해서 이만큼 변화한 것 같아요.”라고 설명했다.

  

■ 지원을 받았지만 준비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외지인의 발길이 없는데다 마을 내 슈퍼조차 없던 곳에 도시민이 이용할 공동 화장실이나 샤워실, 식당 등기반시설이 있을 리 만무했다. 

시설 마련부터 체험 프로그램까지 모든 주민이 함께 고민했다. 

사업 시행 초기에는 단 하나의 결정이라도 대화하고 주민 동의를 얻으려고 회의만 일주일에 2번씩 했다고 한다. 

이는 부래미주민위원회의 원칙을 보여준다. 

‘마을 만들기의 중심은 주민이어야 한다.’라는 것이다. 

대화 끝에 합의를 본 것에 대해 모두 최선의 힘을 모으는 것이 부래미 주민의 ‘성격’이다.

주민들은 우선 체험공간 마련을 위해 지원금을 제외한 2억여 원의 땅과 인건비를 자비와 탐으로 해결했다.

그렇게 2004년 통나무로 만든 체험교육관이 세워졌다. 10여 농가는 부족한 숙박 문제 해결을 위해 민박을 치기도 했다.

지금은 마을 한가운데에 농림부의 농촌마을종합개발사업 대상지로 선정돼 지원받은 예산으로 마련한 체험학습관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2005년부터 5년간 율면 석산리, 북두리, 산양1·2리, 산성1리 등 6개 마을을 함께 발전시키는 ‘율면 석산권역 농촌마을 종합개발’ 사업의 첫 결과물이다. 

15억 원을 투입한 체험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강당과 세미나실, 펜션식 숙소 2개동 9실, 식당 등을 갖췄다.

이와 함께 4계절 내내 농촌 생활을 맛볼 수 있는 프로그램부터 부래미만의 특화 프로그램도 고민하기 시작했다.

우선 포도와 복숭아, 옥수수 등 기존 농가를 활용한 체험농장을 마련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마을에서 재배한 콩을 맷돌에 갈아 순두부를 만들고 유기농으로 재배한 찹쌀을 떡메로 쳐 인절미를 만드는 것도 주민이 개발한 특별한 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이다.

여기에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더해 여느 농촌과의 차별화를 꾀했다. 

도예가인 우당 김영국 씨(50)가 힘을 보탰다.

원주민이 아닌 그는 1997년 말 마을 어귀에 자리한 사찰을 다니면서 부래미 마을 주민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순박한 마을 사람들에게 끌려 작업실과 삶터를 이곳으로 옮겼고, 98년부터 단독으로 도예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었던 것. 그의 부인이자 천연염색 전문가인 남혜인 씨(47)도 재능을 살려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이 부부는 부래미가 농촌체험마을로 지정되자 본격적으로 친구들을 불러 마을에 벽화를 그리고, 농가마다 주인의 이름과 재배식물을 기록한 목간판을 만들어 세우는 등 곳곳에 문화예술의 향기를 퍼트렸다. 5년 전에 느꼈던 부부의 손길은 지금도 마을을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김 씨는 “기자님이 처음 왔을 때는 주민들이 공동체 사업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니까 나섰지만, 지금은 노하우를 쌓아 다들 너무 잘하셔서 전 제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며 “마을 주민이 주인으로서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가꿔야 진정한 농촌생체체험마을이 가능하고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뒤로 빠졌다지만 지금도 그는 마을회관 앞 안내판에 마을지도를 그리고 농장마다 썩지 않는 도자기 명패를 설치하는 등 재능기부를 하며 원주민 못지않은 애착을 보여주고 있다. 부인 남 씨도 체험장 규모를 넓혀 단체 관광객을 위한 천연염색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처럼 주민이 주인의식을 갖고 함께 만든 하드웨어와 인프라 덕에 체험마을 선정 첫해에 연3천여 명에 불과했던 관광객이 이듬해 2~3배 늘어나고 2008년에는 3만 2천여 명 방문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 마을에서 80년째 살고 있다는 0모 할머니(90)는 “처음에는 시끄러웠는데 얘들 웃음소리 나고 그러니까 좋지 뭐, 이제 버스 안 들어오면 불안해. 오늘 아침에도 버스 2대나 왔어”라고 말했다.

  
■ 하지만, 마냥 순조로웠던 것은 아닌가 보다. 

“농사지으면서 체험마을을 만드는 것도 힘들고, 똑같은 소득 요구하는 일부 주민들 설득하며 다툴 때도 힘들었고, 자꾸 달라지는 행정 요구에 맞춰 서류 만들고 법인체를 꾸리는 것까지 모두 힘들었다”고 술회하는 이 총무의 말은 세상에 시행착오와 실패 없는 성공은 없음을 방증한다. 

‘차라리 내가 이사갈란다’며 화를 내던 주민도 있었다는데 어떻게 힘을 모으고 여기까지 왔을까. 

이 총무는 부래미가 다른 농촌체험마을만의 성공 비법 2가지를 알려준다. 지원금과 수익 등에 대한 투명성 확보와 출향인을 비롯한 전문 인력 활용이 그것이다.

“어르신 중 수익을 현금으로 받고선 까먹고선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어요. 그런데 컴퓨터를 배우고 마을 홈페이지를 통해서 모든 거래를 볼 수 있게 되니까 그런 문제들이 싹 사라진 거죠.”

모든 주민이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거래 내용을 공개하면서 더 돈독한 신뢰가 쌓였던 것. 

여기에 방문객이 늘어나면서 전문인력의 필요성을 느껴 마을 주민이 돈을 모아 월급을 지급하면서까지 외지의 사무장을 채용하기로 했다고. 

부녀회가 음식과 숙소 청소 및 관리를 맡고 각 농가 주인이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주민이 할 수 있는 것은 직접 하고 전문 인력이 필요한 부분에 아낌없는 공동투자를 한 것이다. 

현재는 청소년교육체험캠프 기획자로 수년간 일해왔던 채보현 사무국장이 마을에 상시 머물고 있다. 

건물을 지을 때에는 인근 대학의 교수에게 자문하고, 외부 팀에 컨설팅을 받는 등 전문가의 도움을 받기 위해 발품을 팔았단다.

또 고향을 떠났던 이들의 관심을 되돌리려고 ‘홈 컴 인 데이’를 마련해 다시 고향을 방문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다시 본 마을에 자부심을 느낀 출향인들은 뜻을 모아 마을 뒤 편에 안성 이씨 사당을 세우고 농산물 직거래를 성사시키는 등 고향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고 있다.

이처럼 지난 5년간 마을에서 벌어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가 ‘많이 달라지고 좋아졌다’는 기자의 말에 대꾸하던 이 총무의 마지막 말이 떠오른다.

“우리 마을이 외적으로 변화가 있지만 실은 내적 변화가 더 커요. 똑똑한 사람, 돈 많다고 잘 되는 게 절대 아니에요. 우리 주민 모두 진짜 많이 의식이 변했어요. 아직 성공이라 할 수 없지만 지금이 가능케 한 가장 큰 이윱니다.”     류설아기자rsa119@ekgi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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